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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3일 11시 1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4일 14시 12분 KST

2014년 우크라이나의 교훈

Gleb Garanich / Reuters

외교와 협상이 나라를 지켜준다? 허황한 이야기다. 세치 혀를 가지고 천하를 주유하던 사람들이 설치던 약육강식의 중국 춘추전국 시대 장의, 소진 이야기에 그치지 않는다. 국제 질서를 규율하는 국제법이 자리잡고, 주권절대의 국민국가가 등장하여 말 그대로 회의가 춤추던 근대 유럽에서도 결국 외교란 약소국을 어떻게 요리할까에 관한 것이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어볼 것도 없다. 흔히 993년 고려를 침입한 거란에 대하여 서희가 외교 담판으로 소손녕의 6만 대군이 물러나게 했다고 역사는 칭송하고 있다. 그러나 외교만으로 물리친 것이 아니다. 당시 고려는 몇 십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1018년 거란이 10만 병력으로 세 번째 고려를 침공하였다. 이때 고려는 강감찬이 20만 병력을 거느리고 이에 대항하여 물리쳤다.

그런데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 대한제국은 어떻게 망했는가?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끌어들이고 미국까지도 끌어들여서 왕조, 아니 기득권을 유지해보려고 했다. 척외를 국시로 삼은 대원군도 청나라와 일본에 줄을 대고 있었고 러시아를 끌어들이는 것에도 귀를 기울였다. 영토를 보전하고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겠다는 결의와 이에 필요한 힘을 갖추지 못한 조선은 간단하게 식민지로 전락하지 않았던가? 외교와 협상만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가를 조선을 역사로 증명하였다.

먼 과거로 갈 것도 없다. 동구의 공산블록이 무너지고 시장경제가 세계의 곳곳의 일반적인 현상이 된 세계화 시대, 모든 것이 계약과 협상에 의해 결정될 것으로 보이는 21세기에 땅 따먹기 전쟁이 일어났다. 영토할양이란 먼 과거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의 일인 줄만 알던 시대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 2014년 우크라이나에서 간단한 전투가 있고 영토가 빼앗기는 100여 년 전에나 있음직한 일이 벌어졌다.

유럽 기준에서 볼 때 우크라이나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60만 평방킬로미터로 남한의 6배, 한반도의 3배나 되는 나라로 서유럽에서 가장 큰 프랑스보다도 넓다. 인구는 1992년에 5천만 명을 넘었지만 그 후 감소하여 4,300만 명이다. 인구도 러시아를 제외한 유럽에서는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태리 다음 규모다. 문화나 역사 또한 만만치 않다. 슬라브즈족이 동진하고 몽고 치하에서 모스크바가 중심이 되기 전까지는 키에프공국이 슬라브족의 중심국가였다. 그러나 근대 이후 러시아에 치이고 볼셰비키 혁명 후에는 소련에 편입되었다. 참고로 유명한 레프 트로츠키와 레오니드 브레즈네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소련 내에서의 역할은 식량 공급과 서방 방위의 최전선이었다. 흑해는 소련 지중해 함대의 중심으로 그 기지가 유명한 오데사다. 볼셰비키 혁명을 다룬 영화 '전함 포템킨'의 무대가 오데사와 흑해다. 이로 인하여 소련의 핵미사일 기지가 우크라이나 영토 내에 존재하였으며 핵무기 보유가 1900기로 세계 3위였다. 참고로 소련 해체 당시에 우크라이나는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받는 대신 1900기에 달하는 핵무기를 포기했으며 핵탄두 1기당 300만 달러를 받았다는 설이 있다.

넓은 국토는 평원으로 비옥한 흑토 지역으로 2011년 세계 곡물 수출 3위의 국가다. 식량이 자급된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인가. 다만 지하자원이 없고 소련의 역내 분업 체계로 인하여 변변한 산업이 없는 상태에서 소련 멸망 후 1991년 독립하자 경제적으로 낙후한 지역으로 남아 있게 되었다.

문화도 무시 못 한다. 소설가 고골이 우크라이나 출신이고 유명한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에프와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 스비야토슬라프 리히터가 역시 우크라이나 출신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유명한 발레의 최정상인 키에프 발레단이 수도 키에프를 근거지로 하고 있다.

이런 우크라이나의 정치는 항상 불안정하였다. 아마도 낙후된 경제가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는 예외 없이 부패해 있다. 러시아나 미국이 뒤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것도 한 원인일 것이지만, 아무튼 우크라이나는 크게 두 개의 정파로 나누어져서 대립하였다. 알다시피 친러시아와 친서방(유럽연합 및 미국)으로 갈라져 있다. 2012년 선거에서 친러시아적인 빅토르 야노코비치 대통령이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으로 EU 가입을 목표로 그 동안 추진되었던 유럽연합과의 경제협력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는, 말하자면 서방의 경제에 편입하려는 협정이 무산되자, 친 유럽 세력이 들고 일어나서 거의 내란 상태로까지 발전되었다. 2014년 견디다 못한 대통령이 러시아로 망명하였다. 그러자 권력을 잡은 세력이 반러시아 정책을 폈다. 이번에는 친러시아 세력이 반발하였다. 크리미아반도 내의 친러시아계 주민이 반기를 들자 우크라이나 정부가 이에 강력하게 대응하면서 러시아가 개입하게 되고 크리미아 반도는 러시아에 편입되었다. 과거 짜르 치하 시절, 크리미아는 러시아 영토였다. 볼셰비키 혁명 후 우크라이나가 소련에 편입된 후 후르시쵸프가 우호의 표시로, 그리고 통치의 편의를 위하여 크리미아 반도를 우크라이나에 편입시켰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흑해함대의 모항으로 임차해서 러시아해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크라이나 영토인 크리미아는 21세기에 러시아 영토가 되었다.

독립 이래로 우크라이나의 친러, 친서방 양대 정치 세력이 갈등을 겪는 동안 이들을 우크라이나를 둘러싼 외교적 회의는 말 그대로 춤추고 있었다. 우크라이나의 정치세력이 자기 존립을 위하여 그리고 러시아나 미국, 유럽이 자기들의 이해관계 관철을 위하여 눈부신 외교활동을 벌였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지나가는 천연가스 파이프 통과료와 저렴한 가스 공급가격을 가지고 위협했고 서방은 자금 제공으로 위협하였다. 여기에 우크라이나의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 편을 갈라 싸웠던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국가 제1의 의무인 영토보전에 실패하여 영토 일부를 내주고 일부 지역은 지금도 반란 상태에 들어가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우크라이나는 오랜 역사와 문화적 힘을 가진 만만찮은 나라지만, 친 러시아와 친 유럽 세력으로 나누어진 정치판의 분열과 갈등 속에 국가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힘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2014년 국토의 일부를 빼앗겼다. 친러파 현직 대통령이 러시아로 도망가 버린 것이 상징하듯, 각 세력이 기대는 외세를 상대로 외교 협상만 벌였던 것이다. 외교와 협상이 궁극적인 문제해결 수단이 될 수 없다. 국민의 지지를 받는 나라를 지키겠다는 강고한 결의와 필요한 힘을 갖추지 못하면 외교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