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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1일 10시 45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01일 14시 12분 KST

드라이버와 칸타빌레

나의 존재는 만 3년 6개월차의 서킷 '서당개' 이다. "서당개 3년이면 풍월을 읊는다"는 옛 속담도 있지만 아직도 나는 '관찰자'에 불과하다. 처음으로 국내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문화였던 자동차 경주와 마주한다는 설레는 마음을 안고 트랙데이를 방문했을 때가 생생하다. 때는 정열의 계절인 무더운 여름이었고 주말 이전의 금요일이라 한산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 시절 나는 영암 F1경주장 상설 패독(Paddock)의 강렬한 햇빛을 피해 그늘진 피트(Pit) 속에서 주행을 나간 친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첫 서킷 방문으로 생소함이 섞인 약간의 지루함을 틈타 책을 보는 중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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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석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멀리서 오케스트라의 랩소디가 들려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펜스로 달려가 랩소디의 정체를 확인했다. 그 정체는 트랙을 달리고 있는 파란색 포르셰가 내고 있는 중저음의 요란한 굉음이었다. 그리고 그 주변에서 순차적으로 달려오는 다양한 차들의 높고 낮은 엔진 소리들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섞이며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길게 뻗은 코스에서 다가와 직선구간에서 내는 강한 소리와 다시 커브를 향해 멀어지는 소리들은 마치 능숙한 지휘자에 의해 잘 해석된 오케스트라의 완벽한 '강약'의 템포와 '메조 포르테'와 '메조 피아니시모'와도 같았다.

그때부터 나는 그 규칙성과 불규칙성이 공존하는 이 신비로운 음악을 능동적으로 듣고 살피는 '관찰자'가 되었다. 이 역할은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고 일상의 소중한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서킷 위의 운전자는 단순한 '드라이버'의 개념보다 자동차라는 악기를 연주하는 '칸타빌레'로 나에게 각인되었다.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찰나의 순간에 경험하게 된 각성이 내 삶에도 작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뒤로 평균적으로 2주에 한번씩 함께하게 되는 이 아마추어 '칸타빌레'들은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 중에서는 취미와 여가를 구분할 줄 아는 선진문화의 '취미'라는 개념을 올바르게 받아들이고 있었으며, 미적 창조활동을 끊임없이 계발해나가는 열정을 가진 이들이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마 이들은 아마추어들이기 때문에 더욱 절실한 열정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주행 후 땀범벅으로 지친 상태에서도 헬멧과 장갑을 벗어 말리며, 미리 예습한 '레코드라인'을 벗어난 실수한 흔적들을 서로 의논하느라 분주하다. 그리고 각자의 노트북과 스마트 장비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차를 다시 세팅하고는 다음 주행을 위해, 더 나은 데이터를 얻어내기 위해 준비한다. 이런 모습들은 악단들이 연주 후 악보에서 틀린 부분을 체크하고 더 정확한 소리를 내기 위해 악기 조율을 다시 맞추는 모습들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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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은석

가끔 공도에서 활약하는 무적의 드라이버들이 서킷에 관심을 가지거나 혹은 서킷 입문을 놓고 갈등하며 현재의 능숙한 '칸타빌레'들에게 조언을 구하는 경우가 있다. 이 무적의 드라이버들과 서킷에 갓 입문한 이들이 '칸타빌레'들에게 조언을 듣고 난 반응은 하나같이 공통된 것들이었다.

왜 자신의 감각을 따르는 주행이 아닌 주변의 사물이나 설치물 등을 표식으로 활용하여 정해진 레코드라인을 "외워야 하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전을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 외우는 사람이 더 좋은 기록을 내는 것 아니냐는 의문들이었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들과 같은 생각을 할 것이다. 어쩌면 서킷에 입문한 지 오래된 이들도 이 방법 외에 더 잘하는 방법을 묻고 싶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 주행에서는 아무리 잘 외워도 정해진 레코드라인을 지키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다들 잘 알고 있다. - 실례로 '무한도전'에서 방영되었던 '노홍철' 편이 그러했다.- 이는 악보를 외우거나 보면서 연주하는 이들이 모두 완벽한 음악을 구현해 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연주자들은 악보를 정확히 읽고 해석하며 다음 마디에서도 정확한 음을 연주하기 위해 이전 마디에서부터 미리 준비하며, 이 모든 것을 완벽히 외운 후에야 감성을 더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단계가 되기 전까지는 정해진 악보를 완벽히 지키며 실수 없도록 외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드라이버들도 정해진 레코드 라인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한 다음에 본인의 감각을 더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칸타빌레와 드라이버의 공통점이다.

나는 전문가도 아니며 '서당개'도 되지 못한 관찰자이지만 감히 첫 입문자들에게 말하고 싶다.

F1의 전설이 되어버린 천재 드라이버이자 시대 최고의 섹시남인 '제임스 헌터'도 모델 출신의 첫 아내인 '수지 밀러'를 처음 만날 때, 피트 맨바닥에 누워 레이싱 자세를 취하고 레코드라인을 외우고 있었다. 그는 악보를 정확히 외우고자 하는 완벽한 '칸타빌레'였던 것이다.

비록 공도에서 활약했던 무적의 드라이버 출신이라 하더라도 겸손을 취하고 정해진 레코드라인을 외워서 진정한 '칸타빌레'가 되길 바란다.

혹시 아는가? 현대판 '수지 밀러'가 당신의 그 모습에 반해 썸을 이루게 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