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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0일 11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11일 14시 12분 KST

고용불안은 건강을 잠식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정치 인생의 롤모델로 삼는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로 일할 때였다. 대처 정부는 1980년대 경제 살리기를 이유로 국가 기간산업을 민영화하고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항구를 팔고, 가스회사를 팔고, 철강산업을 민간에 팔았다. 그리고 노동자는 대거 해고됐다.

대처가 총리로 취임한 1979년에는 6% 미만이던 실업률이 1984년에는 12%까지 증가한다. 직장을 잃은 노동자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힘들어졌지만, 대처 정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대처 총리는 개인을 보호하는 "사회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그렇게 일관되게 행동했다.

비정규직, 더 많이 아파도 덜 쉰다

대처 정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공업무를 맡고 있던 몇몇 정부기관을 민간에 넘기는 정책을 추진한다. 정부기관이 사용하는 시설을 관리·유지하는 자산서비스부(Property Service Agency)도 그 대상 중 하나였다. 이 과정에서 1972년 부처 설립 이후 한 번도 고용불안에 시달려본 적 없었던 자산서비스부 공무원들이 해고 위협에 직면하게 된다.

훗날 영국의사협회 회장을 맡은 마이클 마멋을 비롯한 몇몇 학자들은 이러한 민영화 시도를 이용한 고용불안이 인간의 건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논문을 출판했다. 그들은 부처 민영화 논의가 시작되기 이전인 1985년과 민영화 논의가 본격화돼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 속에서 일하던 1989년의 자산서비스부 공무원들의 건강상태를 비교했다. 마치 실험실 동물에게 약을 투여하고 그 변화를 보는 것처럼, '고용불안'이 공무원들의 건강상태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에 대한 의도치 않은 실험을 하게 된 것이다.

1995년 영국의학저널에 실린 이 논문은 고용불안이 노동자의 건강을 악화시킨다고 보고했다. 특히 같은 기간 고용불안에 시달리지 않았던 다른 부처 공무원들과 비교했을 때, 그 결과는 도드라졌다. 이후 행해진 연구들은 고용불안이 천식을 증가시키고, 정신건강을 악화시키고, 심장병을 유발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제 해고되지 않았더라도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은 노동자의 삶을 잠식하고 몸을 아프게 했다.

한국에서 고용불안이 사회문제로 본격적으로 떠오른 것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겪으면서였다. 하청이나 파견직으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급증하면서, 언제 해고될지 모르는 고용불안을 일상으로 안고 살아가는 노동자가 늘어났다.

2011년 수집된 제3차 근로환경조사에 참여한 노동자 2만6천여 명을 분석해, 원청 정규직 노동자와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의 근무조건을 비교하는 연구를 진행한 적이 있다. 지난 1년간 몸이 아픈데도 참고 일한 경험이 있는 경우를 측정했을 때, 하청 비정규직은 원청 정규직에 비해 그 빈도가 2배 이상 높았다. 그러나 지난 1년간 몸이 아파서 직장 일을 하루 이상 쉬었던 경험이 있는지 물었을 때는, 원청 정규직에 비해 하청 비정규직의 '그렇다'는 응답률이 오히려 30% 이상 낮게 나타났다. 언제 해고될지 모르고 또 일정한 기간마다 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연차나 병가를 쓰지 못한 채 몸이 아파도 참고 일하고 있었다. 회사에 밉보이면 언제 해고될지 모르니, 그들은 더 많이 아파도 덜 쉬고, 그래서 더 많이 참고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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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직 노동자도 고용불안에서 자유롭지 않다. 2007년 현대자동차 판매직 노동자 1500여 명에게 '2년 내 직업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라고 물었더니 48%가 '그렇다'고 답했다. 울산 현대자동차 공장에서 조립 작업을 하는 노동자들. 한겨레

아픈 걸 참고 일하는 노동자가 계속 버틸 수 있을까? 그럴 리 없다. 어느 순간 그 노동자는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것이다. 기존 경영학 연구들은 그처럼 고통을 참고 일하는 노동자들을 방치하면, 그들의 건강상태가 심각하게 되어 장기적으로 업무 효율에 지장을 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한국의 회사 입장에서 그런 우려는 사실이 아니다. 대기업들은 그 부담을 하청업체에 넘기고, 하청은 노동자 개인에게 그 부담을 넘긴다. 그래서 기업들은 버티지 못한 병든 노동자를 해고하고 새로운 비정규직 노동자를 채용한다. 한국 사회는 노동시장에서 가장 약한 사람에게 부담을 떠넘기는 잔인한 논리 속에 운영되고 있다.

그렇다면 정규직 노동자는 고용불안 문제로부터 진정 자유로울 수 있을까? 2007년 현대자동차 판매직 노동자 1500여 명을 대상으로 진행된 연구보고서가 있다.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튼튼하다는 노동조합의 구성원이자,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인 그들에게 물었다. '앞으로 2년 동안 현재의 내 직업을 잃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묻는 질문에 48%에 해당하는, 절반에 가까운 노동자가 '그렇다'라고 답했다. 쉽사리 이해할 수 없는 결과다.

현대차 노동자 48% "2년 안에 잘릴 수 있다"

그들은 왜 그토록 불안해했을까? 그들은 1998년 IMF 경제위기를 겪으며 회사가 동료의 절반을 정리해고하는 과정을 겪었고, 이후에도 일상적으로 업무를 통합하고 외주화하는 구조조정을 겪었다. 회사는 필요한 시기마다 경영상의 어려움을 말하며 '정리해고' 이야기를 꺼낸다. 동료의 절반이 해고되는 것을 지켜봤던 그들에게 그 이야기는 실제 위협으로 다가온다. 노동자들은 '나도 잘릴 수 있다'는 만성적인 불안감 속에서 일하게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고용불안은 사 쪽의 강력한 협상 카드로 IMF 경제위기 이후 지난 18년간 사용됐다.

노동법의 사각지대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이마저도 다른 세상 이야기지만, 현재 한국에서 근로기준법상 노동자를 합법적으로 해고할 수 있는 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경영상의 어려움으로 인한 정리해고이고, 또 하나는 노동자의 잘못으로 인한 징계해고이다.

현재 논란이 되는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혁은 또 하나의 새로운 합법적 해고를 추가하려고 한다. '공정 인사 지침'이라 불리는 이 행정지침의 내용은 '저성과자 해고'이다. 회사가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노동자에게 교육과 전환배치 등의 조치를 취한 후, 변화가 없으면 해고할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게 주 내용이다. 정부는 이러한 절차가 합리적이고 투명한 해고 과정을 보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공적 안전망 없어... 고용불안 극대화

그러나 '저성과자 해고'가 어떤 방식으로 악용될 수 있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치 않다. 업무 능력을 명분 삼아 사 쪽 지시에 적극적으로 따르지 않는 사람들, 노동법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노동자들, 더 나아가 '아플 때 참고 일하지 않는' 이들을 해고하는 과정에서 이 행정지침은 효과적인 도구가 될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는 노동자를 해고하기 위해, 더 이상 회사는 징계를 주거나 제 발로 퇴사하도록 유도하는 수고를 감수할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

고용불안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느 사회에나 존재한다. 그러나 한국처럼 해고된 노동자들이 생계를 기댈 수 있는, 재취업을 위해 교육받을 수 있는 공적 안전망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사회에서, 고용불안이 주는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고용불안은 노동자를 한 걸음만 내디디면 낭떠러지인 절벽 끝에 세워놓는다. '저성과자 해고'로 인해, 노동자들은 합당한 이유 없이 해고될 수 있다는 위협 속에 일하며 법이 보장하는 최소한의 권리조차 요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다.

인구 집단의 건강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지난 20년간 왜 한국의 자살율이 이토록 급격히 증가했는지에 대해 자주 질문한다. 1997년에 한국의 10만 명당 13.1명이던 자살율은 2014년 27.3명으로 2배 이상 늘어났다. 현재 한국은 가장 생산적인 20∼30대 젊은이의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인 나라이다. 무엇이 5천만 인구가 살아가는 이 공동체를 그토록 잔인한 사회로 바꾸어놓았을까.

개인이 자살했을 때, 우리는 그 원인을 찾기 위해 심리적 부검을 한다. 그 사람의 의학적 기록과 사회적 관계를 검토하며 무엇이 그 개인을 자살로 몰고 갔는지에 대해 파악한다. 한국과 같이 한 사회의 자살률이 급격히 증가했을 경우, 그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이 공동체에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검토해야 한다.

한국에서 자살률의 급격한 증가는 1997년 IMF 경제위기 직후부터 시작됐다. 그 시기는 비정규직 고용이 전 사회적으로 급격히 확산되기 시작한 때이다. 나는 2000년대 한국 사회를 아프게 한 주요 원인으로, 많은 이들에게 삶보다 죽음을 선택하게 만들었던 원인으로 비정규직 고용을 주목한다. 이 시기부터 저임금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을 감수하며 고용불안 속에 일하는 노동자 수가 증가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안정된 직장에서 일했던 정규직 노동자들조차 자신이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불안 속에 일해야 했다.

다시 도전할 수 있는 패자부활전이 존재하지 않는, 해고된 이들을 지원하는 공적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해고는 살인'이 될 수 있고, 언제 해고될지 모른다는 고용불안은 삶을 뿌리째 흔드는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현 정권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저성과자 해고' 행정지침은 고용불안을 전 사회적으로 만성화시키고, 아파도 참고 일하는 그러다 견디지 못하고 자살로 삶을 마감하는 노동자의 수를 늘리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2012년 대통령 공약, '정리해고 요건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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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고용안정 및 정리해고 요건 강화'를 추진하겠다고 천명했다. 2012년 12월16일 '박근혜의 경제민주화' 공약을 발표하는 모습. 한겨레 이정우 선임기자

2012년 대선에서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세상을 바꾸는 약속, 책임 있는 변화'라는 이름의 공약집으로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꿀 것인지 여러 청사진을 제시했다. 그 책의 183쪽에선 경기침체 장기화에 따른 고용불안의 심각성을 지적하며 '고용안정 및 정리해고 요건 강화'를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고 있다. 보수 정치인의 시각에서도 한국 사회에서 쉬운 해고와 고용불안은 심각한 문제였기 때문일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은 초심으로 돌아가 대선 공약과 배치되는 '저성과자 해고' 지침을 재고하길 바란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2016년 2월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