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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06일 13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4월 07일 14시 12분 KST

더 위험할수록, 더 약한 네가

1962년 김종필-오히라 마사요시회동이 진행되었다. 한국의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의 외무장관을 만나, 청구권 3억달러를 핵심 조건으로 외교 정상화에 합의했던 것이다. 1961년 5·16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대통령은 일본의 식민지 수탈에 대한 시인이나 사과 없이 양국의 관계를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공식적으로 회복시킨다. 회동이 진행되고 10일 뒤, 일본의 동양레이온은 자신들이 사용했던 기계를 한국에 넘기는 설비 인수인계 계약을 체결한다.

'인조 실크'로 불리던 레이온을 생산하던 동양레이온이 기계를 전쟁배상 물품으로 내놓은 것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인조섬유인 나일론과의 경쟁에서 레이온이 밀리면서 수익모델이 악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는 레이온 공장에서 발생하는 이황화탄소 중독으로 인한 노동자들의 건강 악화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1929년 레이온 공장의 노동자 최초 중독 사례가 보고되고 1932년과 1934년에 중독으로 인한 조현증과 말초신경 마비가 학계에 보고되었다. 이황화탄소 중독은 1930년대에 일본에서 가장 흔한 직업병이 되어 있었다. 동양레이온에 이와 같은 직업병 발생의 증가는 무시할 수 없는 부담이었다.

원진레이온·제일화학이 한국에 들어온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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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이황화탄소 중독자로 판명된 원진레이온 노동자들이 회사 앞 고 김봉환씨의 빈소에서 111일째 직업병 인정을 요구하며 침묵농성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

흥한화학섬유(훗날 원진레이온)는 1964년 그 기계들을 받아 1966년부터 1991까지 한국에서 레이온을 생산했다. 일본은 기계를 한국으로 넘기면서 관련된 노동자들이 이황화탄소 중독에 걸릴 수 있는 위험에 대해 통보하지 않았고, 한국에는 이황화탄소 농도를 측정하고 중독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규제 방안이 없었다.

원진레이온은 산업재해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재해사업장으로 인정받아 2만5천 시간 무재해 등록증을 정부로부터 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기세를 아낀다는 이유로 환기창을 꺼놓은 채, 개인 안전장비도 없이 한 달에 300시간씩 일했던 노동자들의 몸이 무사할 리 없었다. 1991년 사망한 김봉환씨의 137일간 장례투쟁을 시작으로 원진레이온의 이황화탄소 중독이 사회적 이슈가 되기 시작했고, 지금까지 900명이 넘는 노동자가 이황화탄소 중독 진단을 받았다. 원진레이온은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산업재해가 발생한 단일 사업장이라는 오명을 갖게 된다.

원진레이온은 직업병 문제를 감당하지 못해 마침내 도산한다. 정부는 민간기업 중에 인수업체를 찾지 못하자 1993년 공장 폐쇄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 기계들은 1994년 중국 단둥시 화학섬유공사에 팔려간다. 1966년 일본에서 합법적으로 넘어온 기계가 한국에서 900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삶을 망가뜨리고, 그 기계들이 중국에 넘어가 다시 얼굴을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삶을 망가뜨리는 것을 막고자 노동자들이 모였지만, 기계는 끝내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었다.

석면은 한때 '기적의 광물'로 여겨졌다. 내구성과 단열성이 뛰어나, 수많은 건축자재들이 석면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아시아 지역 최대의 대규모 석면 공장은 일본석면(Nippon Asbestos Co.)이었다. 일본석면은 1969년 대만을 시작으로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석면을 생산하는 합작회사를 설립한다.

1971년 피해자 한국은 1990년엔 가해자로

일본석면이 일본을 떠나 규제가 느슨한 아시아 지역에 석면회사를 설립하기 시작한 것은 석면이 발암물질이기에 엄격한 작업장 내 통제가 필요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일본에서는 1937년부터 이미 석면 노출의 건강 영향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고 석면 노출로 인한 폐암 발생이 1960년에 처음 보고되었으며 1972년 일본 산업보건법은 석면 노출을 엄격히 제한하기 시작했다. 일본석면은 그런 규제를 벗어나 더 값싼 노동력을 이용할 수 있는 아시아 시장을 찾았던 것이다.

일본석면이 1971년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한국에 설립한 합작회사는 부산의 제일화학이었다. 인건비가 저렴하고 석면 노출에 대한 규제가 존재하지 않으며 일본과 가까운 한국은 합작회사를 설립하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제일화학을 통해 매달 생산된 15t의 석면 중 절반은 일본과 외국으로 수출되었다. 위험한 생산공정을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에서 수행한 뒤 생산품을 일본으로 가져가고 다른 나라로 수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면은 '기적의 광물'이 아니라 폐암과 악성 중피종을 일으킬 수 있는 발암물질이었다. 1977년 세계보건기구(WHO) 산하의 암 연구기구는 석면을 1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 전세계의 석면 생산량은 같은 해를 기점으로 480만t이라는 역사상 최고의 수치를 기록한 후 감소하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 악성 중피종 환자가 석면 노출로 인해 발생했고, 일본은 2006년 마침내 석면 사용을 금지한다.

한국에서는 1971년부터 제일화학에서 석면을 생산했지만 석면으로 인한 산업재해는 1990년대 후반까지 드러나지 않았다. 물론 석면 공장에서 마스크 하나만 착용하고 일하고, 일을 마칠 즈음에는 석면가루가 묻어 얼굴이 하얗게 변하는 근로환경에서 일했던 노동자의 몸이 건강할 리 없었다. 1994년 50대 여성 노동자의 악성 중피종 사망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것을 시작으로, 한국 사회도 석면 노출의 심각성을 인지하기 시작했다. 제일화학에서 근무했던 노동자들만이 아니라, 근처 학교와 지역 주민의 석면 노출 역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고 한국은 뒤늦게 2009년 석면 사용을 전면 금지한다.

그렇다면 1971년 일본석면이 한국에 세운 제일화학 석면공장은 어떻게 되었을까. 1990년 인도네시아에 '제일 파잘'(Jeil Fajar)이라는 이름으로 이전하여 지금도 운영되고 있다. 1971년 일본석면이 합작회사 제일화학을 한국에 세운 것과 1990년 한국 제일화학이 인도네시아로 이전한 것, 이 두 사건에는 공통점이 있다. 1971년 일본에는 석면 노출을 측정할 수 있는 기술이 있었고 한국에는 없었다. 그리고 1990년 한국은 비로소 그 기술을 가지게 되었지만, 새로 공장을 세운 인도네시아는 그렇지 못했다. 원진레이온의 기계 이동처럼, 한국은 1971년에는 피해자가, 1990년에는 가해자가 되었다.

21살 황유미씨는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공장에 입사하고 2년 만인 2005년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는다. 그녀는 웨이퍼를 여러 종류의 화학물질에 담갔다가 꺼내는 세척 작업을 했다. 먼지가 있으면 안 되는 반도체 공장에서 더없이 '깨끗한' 클린룸에서 일했기 때문에, 백혈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런데 불과 1년 뒤 황유미씨와 2인1조로 일했던 이숙영씨가 급성 백혈병을 진단받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난다. 함께 일했던 2명이 같은 병에 걸렸으니 직업병 아니냐고 묻는 황유미씨 아버지 황상기씨에게 사 쪽은 말한다. 이 큰 공장에서 백혈병 환자가 2명 있는데, 우연히 같은 일을 한 것뿐이라고. 그러나 같은 공장에서 일했던 암 환자들이 점점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반올림)에 그 존재를 알려오면서, '우연'이라는 주장은 힘을 잃게 된다. 2014년 서울고등법원은 황유미씨의 백혈병이 직업병이라는 판결을 내리고, 근로복지공단의 상고 포기로 그 판결은 확정되었다.

글로벌 기업의 '위험의 외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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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의 직업병 피해자와 유족,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 활동가 등이 '반도체의 날'인 지난 10월29일 서울 서초구 삼성전자 본사 앞에서 집단 산재를 신청하겠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삼성은 두 가지 형태로 작업장의 위험을 외주화하고 있다. 하나는 위험한 작업을 국내 협력업체에 하청으로 맡기는 것이다. 특히 화학물질이나 가스 등 위험물질을 다루는 일은 소수 인원으로 소사장이 운영하는 2차 협력업체에 맡긴다. 협력업체들은 이러한 작업을 하다 문제가 생겨도, 원청의 눈 밖에 날까 전전긍긍하며 밖에 알리지 않는다. 심지어 안전보호구를 착용하지 않거나 안전규정을 준수하지 않을 경우 모든 책임을 노동자 본인이 진다는 서약서를 쓰기도 한다. 2013년 1월 삼성전자 반도체 화성공장의 불산 누출 사고 당시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제대로 된 보호구 없이 이를 수습하다 숨진 것은 이런 구조 속에서 필연이었을지도 모른다.

또 다른 위험의 외주화는 노동력이 좀더 저렴하고 작업장 내 규제가 적은 해외 지역에, 기업이 사용하는 화학물질을 '기업 기밀'이라는 이름으로 밝힐 필요가 적은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것이다. 삼성은 중국 시안의 반도체 공장을 비롯해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지역에 총 22곳의 생산 거점을 만들며 공장을 세워가고 있다. 글로벌 기업인 삼성이 세계 각 지역에 공장을 세우는 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규제가 더 느슨한 나라에 세워진 그 공장들이 투명한 안전관리를 하고 있는지 또 다른 피해자가 생겨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삼성은 2015년 7월 조정위원회가 권고한 '독립적인 사회적 보상기구'를 꾸리라는 결정을 거부하고, 직업병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개별적으로 만나 보상하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다. 지난 10월21일, 삼성은 퇴직자 30명과 개별적으로 보상 합의를 했다고 발표했다. 삼성은 '모든 사실을 일체 비밀로 유지'하고 '합의서 내용 위배시 회사로부터 수령한 금액을 반납'해야 한다는 합의서에 서명할 것을 피해자들에게 요구했다고 한다.

삼성이 현재 취하는 행동은 개별 노동자들을 위한 보상은 될 수 있겠지만, 향후 비슷한 직업병 발생을 예방하는 대책이 되지는 못한다. 지금과 같이 가장 위험한 작업을 가장 약한 이들에게 넘기는 외주화가 지속되고 확대된다면, 미래의 '황유미'와 '이숙영'은 규제의 손길이 닿지 않는 국내 하청기업의 비정규직 노동자나 인도나 중국의 누군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아마도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린 그들의 상처와 고통을 우리는 인지하지 못할 것이다.

삼성이 '일본석면'이 되어서는 안 된다

40여 년 전 레이온과 석면을 생산하는 일이 노동자들의 몸을 어떻게 망가뜨렸는지 잘 알면서도, 일본은 한국에 동양레이온의 기계를 넘기고 합작회사 제일화학을 설립하면서 한국의 노동자를 위한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한국 노동자들이 겪을 이황화탄소 중독과 악성 중피종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많은 노동자들이 고통 속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한국의 대표기업 삼성이 누군가에게 1964년의 동양레이온이나 1971년의 일본석면이 되어서는, 아니 1994년의 원진레이온이나 1990년의 제일화학이 되어서는 안 되지 않겠는가. 반올림이 서울 강남역 8번 출구 삼성 본관 앞에서 노숙 농성을 하고 있는 이유다.

* 이 글은 <한겨레21>에 2015년 11월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