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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1월 19일 08시 59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1월 19일 14시 12분 KST

전국에 2명뿐인 '학력 미기재' 후보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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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속살③> 전국에 2명뿐인 '학력 미기재' 후보가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국회의원 예비후보 등록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보등록 서류를 작성하면서 갈등이 생기는 사항이 있었습니다. 학력을 적는 란에 '출신학교'를 적게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적으면 되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동안 학벌철폐운동을 해 온 지인은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부터 학력을 적지 말자'는 주장을 해 왔습니다. 학벌사회에서 벗어나려면 그런 실천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이 출신학교를 내세워 표를 얻으려 할 것이 아니라, 후보자의 정책과 살아온 이력 등으로 유권자들의 판단을 얻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물론 반대의견도 있습니다. 유권자들에게 정보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는 학력기재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논쟁 속에서 지난 2012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진보신당의 비례대표 후보들이 '학력미기재'를 해서 화제를 모으기도 했습니다. 2014년 지방선거 때도 일부 후보자들이 학력을 미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예비후보 등록을 준비하면서, 고민이 됐습니다. 주위의 의견도 물어봤습니다. 일단 학력을 적지 않고 선관위에 서류를 제출했더니, 선관위의 담당자가 물어봅니다.

"학력을 적지 않으면, 명함, 공보물 등에서 학력을 쓰지 못한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순간적으로 약간의 갈등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학벌사회인 한국에서, 선거에 나온 후보자가 학력을 '미기재'라고 적는 것은 유권자들의 판단에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냥 "미기재"로 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나중에 보니, 서울 종로구만 하더라도, 저를 제외한 예비후보들은 모두 학력을 기재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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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현황이 궁금해서 중앙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전국에서 학력을 '미기재'로 한 사람은 900명이 넘는 예비후보자들 중에서 저를 포함해 2명뿐이었습니다.

<중앙선관위 예비후보자 통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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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가 이런 실천을 한다고 해서 견고한 학력주의, 학벌주의가 깨지는 것은 아닙니다. 저보고 '낭만적이다'는 비판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전쟁터 같은 선거판에서 쓸데없이 고집을 피운다는 얘기도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제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그동안 학벌사회에 대해 문제제기를 해 온 분들의 운동에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후보등록을 할 때에 일률적으로 학력을 기재하도록 하는 제도에는 동의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후보등록서류에는 후보자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적게 하면 됩니다. 굳이 일률적으로 학력을 적게 할 이유는 없습니다.

더 웃기는 것은 후보자 경력은 단 2개만 적도록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명함에는 여러개를 적을 수 있지만, 후보등록서류에는 2개만 적어야 한답니다).

사람이 살아오면서 여러 일들을 해 왔는데, 어떻게 2개의 경력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설명할 수 있을까요? 학력을 적게 할 것이 아니라, 후보자가 살아온 이력을 상세하게 소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유권자들에게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어쨌든 저는 전국에 2명 있는 '학력 미기재' 후보가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다른 후보들에게 학력을 기재하지 말자고 강요할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후보등록을 할 때에 학력을 사실상 의무적으로 적게 하는 제도에 대해서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과연 후보자에 대해 판단할 때에, 학력과 '출신학교'라는 정보가 반드시 필요할까요? 같이 한번 생각해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 <선거의 속살>은 필자(하승수)가 서울의 종로구에 녹색당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를 결심한 이후에 경험하는 대한민국 선거의 현실에 대해 시민들과 공유하려는 기획입니다. 어처구니없고 황당한 선거법, 돈많이 쓰고 개발공약을 내세우는 선거문화가 대한민국 정치를 좀먹고 있습니다. 이런 문제들이 공론화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