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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7일 09시 1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27일 14시 12분 KST

말하는 시계와 독립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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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실명을 했을 때 나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것 말고는 아무 일도 안 했던 것 같다.

사실 더 정확히 말하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극도의 무료함과 지루한 생활들은 시간마저 느리게 흘러가도록 붙잡아 놓은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은데도 시간이 너무도 궁금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어떤 방법으로도 나 스스로는 시계를 볼 수가 없었다는 것이었다.

덕분에 가족들은 한 시간에도 수십번씩 시간을 알려주느라 곤욕을 치러야 했다.

수십번 수백번 수천번 묻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대답하는 목소리에선 친절함과 상냥함의 농도가 옅어지고 있었고 그래도 궁금하고 해결할 방법은 물어보는 것 외에 없었던 내 맘도 점점 소심하게 위축되어 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말하는 시계의 발견은 나라의 광복에 비견할 만큼의 환희로 다가왔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독립을 쟁취했고 가족들 또한 적지 않은 해방감을 느껴으리라 추측된다.

아이들 장난감 용도로 만들어진 조잡한 시계 하나가 어떤 한 인간에게 그토록 감동적인 사건을 유발하게 될 것이라고는 제작자는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스무살 무렵 말하는 삐삐와 문자를 읽어주는 휴대전화는 또 다른 모양의 감동을 선물해 주었다.

때 맞춰서 그 녀석들이 등장해 주지 않았다면 풋풋했던 나의 20대 연애스토리는 시작조차 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둘만이 공유해야 하는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메시지들은 누구에게 읽어달라고 하기엔 내용적으로도 그 양적으로도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후에도 말하는 밥솥과 소리나는 가전제품들은 나의 자취생활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었고 음성안내 신호등은 안전한 이동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시계가 그랬던 것처럼 대부분의 것들이 시각장애인을 위해서 처음부터 설계된 것은 아니라는 것인데 휴대전화의 음성은 운전자를 위해 만들어졌고 밥솥도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야하는 주부들을 고려해서 만들었다고 들었다.

오늘은 택배아저씨가 말하는 체중계를 들고오셨다.

이것 역시 귀여운 만화캐릭터가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탄생목적자체가 시각장애인용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이 체중계가 또 다른 감동으로 독립만세를 외치게 만들어 주리라고 확신한다.

꼬박 하루도 안 된 이 시점에 벌써 이 귀여운 체중계는 나의 묵직한 몸의 무게를 수십번이나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나에게 체중관리와 확인은 필수과정 중의 하나이다.

그렇지만 몇 백 그램도 잘 변하지 않는 체중계의 눈금을 매번 봐 달라고 부탁하는 것도 그다지 맘 편한 일은 아니다.

특히 정확한 측정을 위해서 헐벗은 상태로 무게를 잴 때에는 부탁의 곤란함의 정도는 급속도로 상승한다.

나는 밥 먹기 전과 후의 내 몸무게의 차이를 알았고 아침과 저녁의 체중변화를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겐 별것 아닌 일들이겠지만 나에겐 짜릿한 첫경험이고 또 다른 독립기념일이 되었다.

아직은 많은 기업과 상품의 제작자들의 고객 속에 시각장애인에 대한 배려는 많지 않은 것 같다.

그분들이 만약 나의 글을 본다면 작은 배려기술 하나가 어떤 고객에겐 진정 감동으로 다가오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다양한 제품들 속에서 나의 자립생활을 도와주신 제작자들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