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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7월 23일 11시 19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9월 22일 14시 12분 KST

소주예찬

친구들은 술을 많이 먹고 힘들어 하는 나에게 시원한 물 먹고 정신 차리라고 큰 컵에 소주를 담아서 주었다. 뚜껑을 열고 만져서 시간을 알아내는 내 점자시계를 몰래 거꾸로 돌려놓고 막차시간 남았으니 더 먹자고 해서 밤새 나를 붙들어두기도 했다. 언젠가 낯선 편입생 한 명은 이런 광경을 보고 장애인 학대라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매우 진한 친근감의 표시였다. 요즘도 이따금씩 동기들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 친구들의 장애인식이나 인권의식이 훌륭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 대해서 만큼은 별다른 거부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겨레

내가 시각장애와 함께한 지도 20여년이 다 되어가는데 아직도 낯선 장소를 갈 때면 든든한 지팡이와 함께인데도 무언가 어색하고 긴장되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그렇지만 이내 그 거리가 그 장소가 익숙해지는 순간이 되면 마치 장애가 없어지기라도 한듯 씩씩하고 익숙하게 찾아다니곤 한다. 뭔가 깜깜하던 곳에서 환히 불이 켜진 느낌과도 유사한 이 느낌 덕분에 늘 생활하는 집이나 직장에서는 특별한 도움 없이도 편히 다니고 구조도 눈에 보이는 것 같은 착각마저 들기도 한다.

나는 대학에서 수학교육을 전공했다. 우리과에는 그 전에도 지금까지도 나 같은 학생이 입학한 적은 없다. 개강도 하기 전에 교수님들과 조교님들과 학회장 선배님과 줄줄이 면담일정이 잡혔다. 하나같이 너무도 당황스런 나의 존재에 대한 도움의 약속들을 쏟아내고 계셨다. 그 분들의 선의는 내가 원하는 것과는 많이 다른 도움이긴 했다. 밥을 떠 먹여준다든가 화장실에서 용변을 본다든가 하는 것은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동기들도 크게 두 부류였다. 나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착한 친구들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약간의 거리를 두는 어색한 친구들...

삼면이 칠판으로 둘러싸인 강의실에서 변변한 점자교재 없이 교수님의 "여기서 여기로 가면 여기가 되니까 이렇게 되는 거지." 하는 소리를 3시간씩 들어야 하는 전공수업도 당황스러웠지만 그보다는 4년 동안 함께해야 하는 친구들과의 특별한 어색함들이 내겐 더 큰 문제였다.

일단 모임부터 모두 나가기 시작했다. 전체모임이나 대면식은 물론이고 두세명만 모인다 해도 비집고 들어갔고 심지어는 모임이 없으면 내가 만들기도 했다.

대학생 모임이라는 게 모두 술자리다 보니 어느새 29일 연속으로 술을 먹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수학실력은 몰라도 주량은 날로날로 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열심히 모임을 찾아다니던 나를 불러주는 모임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적어도 술자리에서 만큼은 어색함 없는 그냥 친구가 되어가고 있었다.

친구들은 술을 많이 먹고 힘들어 하는 나에게 시원한 물 먹고 정신 차리라고 큰 컵에 소주를 담아서 주었다. 뚜껑을 열고 만져서 시간을 알아내는 내 점자시계를 몰래 거꾸로 돌려놓고 막차시간 남았으니 더 먹자고 해서 밤새 나를 붙들어두기도 했다. 언젠가 낯선 편입생 한 명은 이런 광경을 보고 장애인 학대라면서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건 매우 진한 친근감의 표시였다.

내가 집에 들어왔을 때 환하게 켜지던 그 불빛이 나와 친구들 사이를 환하게 해주기 시작했던 것이다. 특별한 인식교육이나 장애설명이 아니라 소주 몇 병으로 정안인들 사이에서의 나의 대학생활은 편안함을 찾아가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서의 어색함은 무의식적으로 학습된 낯설음에 대한 경계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소주는 은근하게 우리를 무장해제 시키고 편히 서로를 받아들이게 만들어준 고마운 선물이었다.

요즘도 이따금씩 동기들을 만나서 술잔을 기울이곤 한다. 그 친구들의 장애인식이나 인권의식이 훌륭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에 대해서 만큼은 별다른 거부감이나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때로는 특별한 교육보다 한잔의 소주를 기울이는 것이 특수교육이나 사회복지학보다 훌륭한 사회통합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내겐 유난히 소주한잔으로 이어진 소중한 인연들이 많다. 나의 낭만적인 캠퍼스생활 그리고 수많은 인연들을 있게 해준 소주에게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