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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04월 03일 11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6월 03일 14시 12분 KST

눈먼 엄친아 이야기

'장애는 특별한 특징이나 질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쉬운 한 마디를 그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수차례 배웠는데 설마 나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내가 바닥 중 바닥을 맛 보고 있을 때 하나 둘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점자를 잘 못 읽는 나를 위해서 교과서며 필기를 녹음테이프에 담아다 주고, 보행이 불안한 나에게 팔을 내어주고 학교 구석구석을 수십 수백번 안내해주던 손길들은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도 무시하던 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안승준

내 몸에 너무도 잘 맞는 옷을 입은 느낌! 마치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듯한 편안한 느낌! 어린시절 내가 느끼던 세상은 이런 표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나만의 원더랜드였다 .

7남매의 대식구를 자랑하는 외가에 10여년만에 탄생한 아기로 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던 나에겐 고급경양식집의 돈까스도 아이들의 로망인 절찬리 개봉 '우뢰매' 영화표도 일기장에 남길 만한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80년대 초 충북 제천이라는 로컬에서 6살짜리 꼬마의 취미가 바이올린이었으니 세상에 더 이상 부러울 만한 일은 그닥 없었던 걸로 기억된다.

반장이라는 감투도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도 세계 수학올림피아드의 당골 수상도 익숙하던 내게 단 하나 부족했던 건 운동이었지만 그마저도 제일 친한 친구이면서 축구팀 주장이었던 동철이와의 모종의 거래로 해결하고 난 뒤였다.

"공부만 잘하는 줄 알았더니 우리 승준이가 축구팀에도 뽑혔구나!" 라고 시대의 엄친아의 출현을 반기시던 선생님들은 동철이의 시험답안이 내 답안과 같은지 다른지 체크하실 여유까지는 없으신 것 같았다.

초등학교의 마지막 겨울방학을 앞두고 마지막 수학올림피아드에 출전했다. 수두룩히 쌓여있는 차석의 파란뺏지가 아닌 수석을 나타내는 하얀 뺏지가 목표였다. 화룡점정을 꿈꿨고, 환하게 웃으실 엄마 아빠를 상상하면서 밤을 지새워 공부하고 결과를 기다렸다.

생애 최고의 크리스마스를 꿈꾸며 어느 순간 고개를 든 내 앞엔 예상과는 너무도 다른 장면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온몸을 감싸도는 스산한 고통들, 뭔가 짓누르는 듯한 무거운 두려움들.

뇌수종이라는 운명을 감당하기엔 13살의 몸둥이는 아직 너무나 작고 약했다.

여리디 여린 살결에 꽂혀 있는 수십개의 바늘 위로 며칠 못 살 것 같다는 사형선고마저 내려지고 신부님께서는 임종을 의미하는 병자성사를 내려주셨다.

그 순간 병문안을 온 담임선생님의 손엔 그리도 바라던 흰뺏지가 들려있었다. 최고의 환희를 가져다주리라 굳게 믿었던 그 쇳덩이는 예수님을 못박았던 그 장면만큼이나 나와 가족들의 극한의 슬픔으로 몰아넣는 절묘한 소재로 사용되고 있었다.

생사를 넘나드는 순간들 속에서 지푸라기같은 생의 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내 한 몸 돌볼 여유라고는 없이 아들을 돌보던 엄마 아빠의 몰골이 흡사 죽어가는 아들과 닮아가고 있을 때쯤 하늘도 감동했는지 생의 기운이 사를 조금은 멀리 몰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돌아온 세상은 뭔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공기도 소리도 냄새도 내 몸에 딱 맞던 그 옷 그대로 인데 내 앞에 펼쳐진 장면은 먹물을 풀어놓은 수채화 물통처럼 뿌옇기만했다. 수천번 감았다 떠도 피가 나도록 눈을 씻어도, 꿈이라 생각하고 벗어나려 해도 변하는 건 없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의 시간들과 전국이 앞마당이라도 되는 듯한 2년간의 무모한 치료일주의 시간을 보내고 특수학교 입학이 결정되었다.

입학하는 그날까지도 특수학교는 내 시력이 돌아올 때까지만 잠시 봉사활동을 하러 가는 곳일 뿐이라 생각하던 헛된 내 자존심이 무너지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독립보행도 점자읽기도 어떤 기초재활도 제대로 되어있지 않던 내가 받아든 중간고사 성적은 겨우 꼴지를 면한 정도였고 교내식당도 혼자서는 찾아갈 엄두도 못내고 어정쩡한 걸음걸이로 허우적거리면서 벽을 더듬는 게 나의 현실이었다.

'장애는 특별한 특징이나 질병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올 수 있는 것'이라는 쉬운 한 마디를 그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이다. 아니 수차례 배웠는데 설마 나는 아니라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내가 바닥 중 바닥을 맛 보고 있을 때 하나 둘 도움의 손길이 다가왔다. 점자를 잘 못 읽는 나를 위해서 교과서며 필기를 녹음테이프에 담아다 주고, 보행이 불안한 나에게 팔을 내어주고 학교 구석구석을 수십 수백번 안내해주던 손길들은 다름 아닌 내가 그렇게도 무시하던 장애인 친구들이었다.

지금까지도 나의 가장 소중한 인맥으로 이어져오는 그 따뜻한 친구들의 손길들 덕분에 나는 다시금 편안함을 회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장애는 치료의 대상이 아니라 재활의 대상이라는 것을 조금씩 받아들이면서 알게된 것이지만 시력을 잃은 상태로도 아직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았다. 학교 밴드부에서 섹소폰을 불고 있었고 소리 나는 공으로 축구도 할 수 있었다. 점자는 느리게 읽었지만 화면을 읽어주는 컴퓨터 프로그램의 도움으로 공부도 독서도 맘만 먹으면 부족함이 없이 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기뻤던 건 다시 수학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았지만 눈이 아닌 다른 부분으로 나도 그들을 언젠가는 도울 거라는 다짐을 하면서 열심히 공부했다.

서울에 있는 대학 수학교육과에 당당히 합격했다. 교생실습 때 아이들과의 짜릿한 수업들이 계기가 되어 특수교육을 대학원에서 다시 공부했다.

지금의 나는 20년 전의 나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수학교사다.

나름 잘 나가던 때도 있었고 정말 비참하게 무너진 적도 꽤 있었다.

아직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지금까지의 나를 만들어 준건 하나하나의 위기들이었던것 같다는 생각을 자주한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그 모양과 크기가 달라서 어떤 이의 그것은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나와 같은 장애는 좀 커보이는 것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 약점들이 그 사람의 전체는 아니기 때문에 극복만 한다면 오히려 상상 못할 에너지를 만들어내는 장점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넘어져 봐야 일어나는 방법을 알듯 나는 바닥을 보았던 경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들 중에도 언젠가의 나를 너무도 닮아있는 모습들이 보인다. 내 작은 소망이 있다면 그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치는 교사보다는 일어나는 방법을 알려주고 꿈의 한계를 넓혀주는 인생선배가 되고 싶다.

꼭 장애가 아니더라도 여러 모양으로 힘들어 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어떤 고통도 그 순간을 견뎌내고 멀리 지나서 바라보면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삶의 양분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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