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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29일 08시 50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9일 09시 08분 KST

나도 비밀통장을 만들고 싶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극도의 집중상태를 유지하며 만들어져 가는 서류작업들은 어떤 이들에겐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감동으로 다가오기라도 하는지 몇몇 직원들은 완성된 나의 통장을 건네며 "참 잘했어요"를 외치며 환호와 갈채를 보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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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내 일과중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은행과 관공서 관련 개인업무이다.

학기중에는 수업 때문에 조퇴나 연가 쓰기가 어려운 직업이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방학시즌으로 날짜를 맞추어서 한꺼번에 처리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직접 방문하는 절차 없이도 비대면으로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늘어나긴 했지만 얼굴 마주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절차들이 아직은 좀 남아있기는 하다.

그럴때마다 겪게 되는 불편함이 하나 있는데 신청서류에 칸 맞춰서 글자를 적고 싸인을 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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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에 있는 은행이나 늘 다니는 길가에 접근성도 좋게 자리잡은 주민센터 정도는 혼자서도 얼마든지 찾아갈 수 있지만 스스로 확인할 수도 없는 밋밋한 글자적기 과제는 그 때마다 나란 존재를 활동보조가 없이는 업무수행이 불가능한 의존적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곤 한다.

내이름 적혀있는 도장과 나랑 똑같이 생긴 얼굴까지 붙어있는 신분증 그리고 그 모든 것의 주체인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있는데도 뭐가 그리 의심스러운지 몇만원짜리 통장 하나 만드는데 제출해야 하는 서류는 적어도 적어도 끝이 나지를 않는다.

미리 적혀있는 자그마한 글씨들을 덧대어 따라 적고 손톱보다도 작은 칸에 한 번은 숫자로 한 번은 한글로 액수를 적고 한 장에도 여러번 반복해야 하는 내 이름을 적어내는 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시력 없는 고객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만들어진 절차가 분명한 것 같다.

할 때마다 달라지는 극도로 단순한 내 싸인도 어떤 의미로 나의 독립성과 자주성을 대변하게 될지 내 상식으로는 잘 이해가 되지는 않는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극도의 집중상태를 유지하며 만들어져 가는 서류작업들은 어떤 이들에겐 '인간극장'의 한 장면처럼 감동으로 다가오기라도 하는지 몇몇 직원들은 완성된 나의 통장을 건네며 "참 잘했어요"를 외치며 환호와 갈채를 보내기도 한다.

그 숭고한 작업을 마치고도 그 성과물이 온전한 내 것이 되려면 또 하나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는데 동행자에 대한 신분확인이 바로 그것이다.

때때로 도가 넘어설 정도의 의심을 담은 그 시간 때문에 한 동료 선생님은 크게 불쾌감을 느끼시기도 했고 젊은 여성분은 나와의 관계를 민망하게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처럼 글씨라도 혼자 쓸 수 있는 시각장애인들의 사정은 그렇지 않은 분들에 비하면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나은 편이다.

눈으로 글자라는 것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각장애인들에게 손 잡아줄테니 같이 적어보자며 서류적기를 강요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적지 못한다는 이유로 계좌개설을 거부당하는 것도 우리나라 은행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웃지 못할 광경들이다.

우리는 디지털 정보화 사회를 넘어서서 4차산업 시대를 준비하는 시점을 살고 있다.

매일 사용하는 pc나 스마트폰에도 생체인식 기술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고 nfc, rfid, 비콘 같은 근거리 무선통신기술도 이름과 동작원리는 몰라도 대중교통과 쇼핑센터만 이용해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기술이 되었다.

사무현장에서도 전자문서는 일반화 된지 오래이고 최첨단 기술까지 언급하지 않더라도 전화나 인증서만으로도 개인을 인증할 수 있는 방법은 너무나도 많다.

실제로 비대면 은행업무나 인터넷 주민센터에서 업무를 처리할 때 그런 기술들은 나라는 개인을 인증하고 증명하는 훌륭한 증명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은행이나 주민센터에서 아직도 종이서류들과 직접 적은 글자들만을 고집하는 이유를 내 머리로는 추측하기가 많이 어렵다.

관련 분야 전문가나 교수님들께 자문을 구해보아도 오프라인 업무에서 여러기술들을 이용하여 사인이나 서류작성 없이도 개인을 증명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작업은 쉽게 구현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개인정보 유출이나 해킹의 염려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온라인 업무에서는 이미 상용화 된 기술들이고 적어도 대리인의 도움을 받아 작성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보안의 수준이 높다는 평가도 받았다.

난 오늘도 적금통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친구에게 도움을 청하고 비밀번호를 포함한 내 개인정보를 그와 공유했다.

스스로 서류작성도 못하는 내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직원의 시선을 받아야 했고 내 친구는 나와 어떤 관계인지 의심 받는 민망한 검증절차를 견뎌야 했다.

비상금 마련을 위한 비밀통장이었지만 나의 친구는 내 불입액과 만기일까지 모두 알게 되었다.

친구에게 밥을 사고 교통비를 제공하는 일은 평상시라면 기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이율 높지 않은 적금통장 하나를 만들기 위한 대가로는 너무 큰 수수료이다.

난 우리나라의 금융기관과 공공기관의 역량을 신뢰한다.

조만간 면대면 업무시에도 종이가 아닌 스마트한 절차와 과정이 마련되리라고 기대한다.

그것은 나와 같은 불편함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에게도 편의로 다가오겠지만 업무의 속도를 높여주어 길게 선 줄을 줄여주고 직원들의 업무를 경감시켜 주기도 할 것이다.

우리에겐 이미 편리한 기술들이 많이 가까이 다가와 있다.

이제 수많은 고객을 상대해야 하는 그들이 적제적소에 그 기술을 배치해 주기만 하면 된다.

나도 혼자 은행업무를 처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