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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01월 19일 06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19일 07시 06분 KST

그날 왜 여섯이나 죽었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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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날이었다. 일 년 중 제일 추운 이맘때쯤 날씨는 그저 밖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형벌이다. 그런 날에 그들은 꿋꿋하게 대거리를 하고 있었다. 망루에 오른 사람들은 날이 서 있었다. 자기에게 닥친 형벌의 부당함을 증명하듯, 낡고 초라한 불덩이 몇 개를 간간이 밑으로 내던지며 겨우내 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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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개발 광풍이 불던 2000년의 서울은 아무리 봐도 이상했다. 여기저기서 '주거환경정비사업'이라는 이름의 재개발사업이 벌어졌다. 선거 때만 되면 집값을 올려주겠다는 약속이 쏟아져 나왔다. 그 민망한 약속은 법을 통해 실현되었다. 법은 이 사업을 '도시 저소득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의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함이라고 멋지게 포장했다.

주거환경정비사업 : 도시저소득주민이 집단으로 거주하는 지역으로서 정비기반시설이 극히 열악하고 노후·불량건축물이 과도하게 밀집한 지역에서 주거환경을 개선하기 위하여 시행하는 사업 - 도시정비법 제2조

이 사업의 수혜자는 도시 빈민이었다. 일단 법은 그렇게 이야기했다. 하지만 정작 그곳에 살고 있던 '저소득 주민'은 오른 땅 값을 견디지 못해 쫓겨났다. 가난한 사람들이 치워진 자리에는 자격있는 번듯한 서울시민이 채웠다. '서울시 주거환경 개선정책 자문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길음뉴타운 개발 전까지 전세값 4,000만원 미만의 주택비율은 83%였지만 이 사업 직후에는 제로로 치달았다. 그곳에 살고 있었던 도시 저소득층 주민 중 뉴타운에 입주할 수 있었던 사람은 열 중 하나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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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서울에서 벌어진 이 사업들은 각각의 양태와 규모로 진행되었지만 발생했던 문제는 매번 비슷했다. 쫓겨나야 하는 사람은 쫓겨나지 않기를 원했다. 쫓아내야 하는 사람은 하루가 급했다. 형식적인 중재가 있긴 했다. 그러나 실제 중재는 용역이 담당했고 경찰이 마무리했다. 용산 참사가 있던 해, 서울시는 '동절기 강제철거 예방대책'을 수립해 시행해오고 있다고 밝혔다. 용산에서의 철거는 겨우내 이뤄졌다.

"지금 겨울인데 갈 곳이 어딨어, 돈도 없는데..."(용산 4구역 철거민)

누구 말마따나 돈 때문일지도 모른다. 법은 쫓겨나는 사람들에게 3개월분의 휴업 보상비와 4개월분의 주거 이전비를 지급한다고 했다. 쫓겨나는 사람들은 이미 올라버린 집값 때문에 새로운 거처를 마련하기 어렵다고 했다. 폭탄처럼 서로에게 돌리고 돌리던 권리금이 하루아침에 휴짓조각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이 사업은 '공익사업'이었다. 공익이라는 이름은 국가에게 사람들을 강제로 쫓아낼 권리는 주었지만, 쫓겨나는 사람들의 사정은 충분히 헤아리지 않았다.

누군가가 곧 오를 지가를 계산기에 퉁기며 흐뭇해하고 있었을 그때, 누군가는 '공익'에 불복했다. 치워져야 할 사람들이 쉽게 치워지지 않았다. 그 대가는 영하를 오르내리는 겨울 날씨만큼이나 혹독했다. 버티는 사람들의 하루하루는 이 거대한 개발사업에 들어가는 막대한 돈, 그리고 지연된 시간만큼의 이자와 비교되었다. 그들의 사정은 숫자보다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언론과 시민들은 욕심으로 포장돼 무대로 끌어올려진 철거민들을 향해 손가락질을 아끼지 않았다. 벌거벗은 존재들은 숫자에 떠밀려 희미했던 목소리마저 지워졌다. 그들은 망루에 올랐다.

그날 새벽, 남일당 망루는 불타올랐다

2009년 1월 19일, 용산구 한강로 2가에 위치한 4층짜리 건물 남일당은 새벽부터 분주했다. 용산 4구역 철거민 등 30여 명은 강제철거를 막기 위해 남일당 옥상에 망루를 만들며 저항했다. 건물 밑에는 경찰 3개 중대, 300여 명이 진압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루에는 시너 등 화학성 물질이 가득했지만 경찰은 이를 고려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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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사 : "특공대원들에게 안에 시너가 있는지, 또 그 양이 얼만지 설명해준 적이 있습니까?"

경찰 특공대 제대장: "구체적인 양 같은 것은 전달받은 게 없습니다."

검사 : "특공대원들에게 망루 내부 구조에 대해서 설명해준 사실이 있습니까?"

경찰 특공대 제대장 : "확인을 못 했습니다."

변호사 : "(위험한 현장 상황 때문에) 팀장이나 제대장에게 '이건 아닙니다. 이렇게 들어가다 우리 다 죽습니다.' 라고 이야기했어요?"

특공대원 :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만약 제가 팀장쯤 되고 경력이 오래됐으면 약간 보류를 했을 거라고 저도 생각합니다."

변호사 : "증인 머릿속에는 증인 같은 경찰관이나 피고인들의 안전에 대해서는 생각을 안 한 겁니까?"

특공대원 : "제가 의견을 얘기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안 됐습니다."

만 하루가 넘는 대치였다. 철거민을 내쫓는 게 곧 실적이 되었던 경찰은 조급함을 감추지 않은 채 진압을 강행했다. 1월 20일 새벽, 남일당 망루는 불타올랐다. 철거민 다섯, 경찰 하나. 여섯이 죽었다.

참사 이후, 이상한 일들

화재사건치고는 이례적으로 신속하게 수사가 진행되었다. 검찰은 경찰을 배제하고 수사를 하겠다고 의지를 밝혔다. 검찰 8명과 수사관 21명, 삼풍백화점 참사 당시와 같은 대규모의 수사단이 꾸려졌다. 하지만 역대 최고 규모의 수사단은 이상하리만치 잦은 실수를 보였다.

용산 참사 직후 유가족은 시신이 어디에 있는지 총 몇 명이 희생되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족들이 제 피붙이의 생사를 애타게 찾아헤매던 저녁, 부검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검찰은 유가족의 동의 없이 시신을 부검했다.

용산 참사 직후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붙잡혔다. 그리고 청와대는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문건을 하나 내려 보낸다.

"용산사태를 통해 촛불시위를 확산하려고 하는 반정부단체에 대응하기 위해 '군포 연쇄살인 사건'의 수사내용을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바랍니다... 예를 들면 ▲연쇄살인 사건 담당 형사 인터뷰 ▲증거물 사진 등 추가정보 공개 ▲드라마 CSI와 경찰청 과학수사팀의 비교 ... 용산 참사로 빚어진 경찰의 부정적 프레임을 연쇄살인 사건 해결이라는 긍정적 프레임으로 바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검찰은 3000쪽에 달하는 수사자료도 공개하지 않았다. 정치적 쟁점이 될 수 있다는 이유였다. 검찰이 감춘 자료에는 현장 채증자료, 초동수사기록, 화재 원인과 관련된 증거, 경찰 지휘관들의 진술, 현장 동영상, 목격자에 대한 수사 등 재판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증거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사건의 최대 쟁점은 '화재의 원인이 농성자들의 화염병 때문이냐'는 것인데 그 쟁점에 관한 경찰의 진술이 중요합니다. 만약 그때 화염병이 경찰 쪽에 날아들었다면 이 화재를 원인 불상이라고 할 이유가 없죠. 경찰 측은 가급적이면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할 텐데 이 화재를 원인 불상이라고 해버렸으니... "(철거민 측 김형태 변호사)

검사 : "증인은 '다 죽어'란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다 죽어버려' 하나는 '다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해' 어느 쪽으로 판단됩니까?"

증인 : "후자로 판단됩니다."

변호사 : "다 피하라는 쪽으로 들었다. 맞습니까?"

증인 : "지금은 그렇게 느껴집니다."

검사 : "김남훈 경사의 사망책임이 누구에게 있다고 보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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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성자한테 있다고 생각합니다." (5초간 침묵 끝에 나온 경찰 특공대 팀장의 답변)

그런데, 왜 죽었는지 모르겠다

법원은 9개월간의 재판 끝에 이 참사의 책임이 철거민에게 있다고 판결했다. 검찰은 용산 철거민대책위원장 이충연 씨에게 징역 8년을 구형했다. 재판부는 이 씨에게 징역 6년을 선고했다. 이충연 씨는 용산참사로 아버지를 잃었다.

당시 사건 수사를 지휘했던 천성관 서울 중앙지검장은 검찰총장에 내정되었으나 인사청문회에서 각종 의혹으로 낙마후 유명 로펌으로 갔다. 철거민에게 중형을 내렸던 양승태 판사는 대법원장을 역임하다 작년 퇴임했다. 진압을 지휘했던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은 20대 총선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나와 당선되어 현재 국회의원이다. 용산 참사 생존자들은 대법원에서 4~6년의 형이 최종 확정되었다.

용산국제업무지구 개발사업은 이후 부동산 경기 침체로 인한 시행사의 부도로 전면 백지화되었다. 9년 전 화재가 났던 남일당 건물이 있던 자리는 현재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사람 여섯을 죽이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감옥에 가둔 그 땅은 고작 주차장이 되었다.

그날, 꼭 그렇게까지 급박하게 진압을 해야 했을까. 용산에 들를 때, 이따금 그 주차장 근처로 가본다. 죽은 사람들의 비명은 차갑게 식어 땅에 묻혔고, 산 사람들의 탐욕은 저리 초라하고 흉물스럽게 얹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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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생각한다. 9년 전 그 사람들, 대체 왜 죽었을까. 잘 모르겠다. 고작 저 초라한 주차장만 남았다. 저 주차장 때문에 사람 여섯이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