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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7일 10시 51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7일 10시 51분 KST

이기적인 감빵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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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이제 막 수감된 동료가 감빵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는 남자 주인공에게 '교도소 생활이 즐겁냐, 아니면 아무 생각이 없는 거냐?'고 비아냥거린다. 주인공이 받아치는 대사는 이렇다. "하나도 안 즐겁다. 나도 너처럼 매일 억울하고 화난다. 그런데 그렇게 못 살지 않냐. 여기서 버틸 수 없다. 살기 위해 이러는 거다."

직업 탓인지 박근혜 전 대통령 생각이 났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박 전 대통령의 구치소 생활이 오늘로 270일째다. 갇힌 그에게 9개월의 시간은 9년처럼 더디게 흘렀을 것이다. 다른 재소자들보다 좋은 환경에서 지내고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말할 것만 같다. "하나도 안 편하다. 나는 니들과 달리 매일 억울하고 화난다. 재판·조사 거부하고 홀로 칩거하는 것도 살기 위해 이러는 거다."

요즘 들어서는 박 전 대통령이 얄미울 정도로 '감빵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될 때가 많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억울한 구석이라도 있지만, 박 전 대통령은 별로 억울할 게 없는데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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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수감생활 초반에 제기됐던 특혜 논란이 사그라들었다. 박 전 대통령을 지원하는 해외 단체는 "박 전 대통령이 더럽고 차가운 독방에서 질병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더 나쁜 조건에서 지내는 재소자들을 화나게 하는 말이지만, 효과는 확실했다. 수용시설 환경을 개선해야 할 문제이지, 박 전 대통령을 더 열악한 곳으로 내몰아 해결할 일은 아니었기 때문이다(그렇지만 여전히 서울구치소 수용자에게 주어진 평균 면적은 박 전 대통령 독방의 10분의 1인 1.06㎡에 불과하다).

재임 중 재소자 인권 문제 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그가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충분히 활용하고 있는 점도 눈에 띈다. 검찰은 지금껏 다섯 차례나 구치소로 찾아가 그를 조사했다. 26일에는 구치소로 찾아온 검사를 30분간 면담했을 뿐 조사를 거부했다. 일반 구속피고인들은 상상도 못했겠지만, 사실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권리다. 검사가 구속수감된 피고인이나 피의자를 검찰청으로 부르는 건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이다. 강제 규정도 아니다. 외국에선 구치소로 찾아가 조사한다. 지금도 경찰이나 국세청, 국정원 등은 수감된 이들을 조사하러 구치소에 간다. 검찰이 불러도 안 가면 그만이라는 걸 박 전 대통령이 몸소 보여준 것이다.

그저 '몽니'처럼 보였던 재판 보이콧과 검찰 조사 거부도 박 전 대통령에겐 전략적으로 가장 유리한 선택일 수 있다. '국정원 특수활동비 수수' 혐의에 대한 검찰 조사 거부는 헌법이 보장한 '진술거부권'을 행사한 것이다. 뇌물 사건에서 돈을 받은 이가 진술을 거부하면, 일반적으로 검사의 혐의 입증이 더 어려워진다. 재판에 나가지 않으면 형량 등에서 불리할 수는 있다. 박 전 대통령 처지에서 보면, 징역 10년 이상이 될지 모르는 형량보다 지지자를 상대로 '정치적 명분'을 챙기는 게 훗날 사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중에 그게 어떤 결과를 낳든 지금 자신의 권리를 착실히 챙기며 '감빵정치'를 해나가는 그를 지켜보는 건 사실 괴로운 일이다. 극소수 지지자를 위한 '정치'가 대다수 국민에게 상처와 분노를 남길 것이란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의 '감빵생활'은 이기적일 뿐 슬기롭지는 않은 듯하다.

단 하나 바라는 게 있다면, '박근혜 특혜'처럼 비치는 권리와 환경이 그의 '감빵생활'을 계기로 다른 재소자들에게도 널리 확대되는 것이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