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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2월 12일 12시 55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02월 12일 14시 12분 KST

비상에의 공포, 그러나 발화하는 용기

비채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모욕은 드러누운 페니스 이성간의 전쟁의 최종 병기는 축 늘어진 페니스. 적진의 깃발은 불완전한 발기. 종말의 상징은 자폭하는 핵탄두 페니스. 그것이야말로 결코 바로잡을 수 없는 불평등이다. 남자가 페니스라고 불리는 근사하고 매력적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여자가 전천후 보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 비바람도 진눈깨비도 밤의 어둠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생각해 보면 보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 남자들이 여자의 불완전함에 관한 신화를 지어내는 것도 당연하다."

(에리카 종 저/이진 역 | 비채, 2013년 10월 14일)

어릴 적 자주 빠져들었던 기분 나쁜 환상 중 하나는 내가 전설 속 구미호가 되어 사내들을 차례차례 해치고 다니는 것이었다. 등교를 준비하는 아침, 배경처럼 흐르는 텔레비전 뉴스 속 앵커의 목소리는 언제나 불길했다. 지난밤에 벌어진 사소한 폭행 사건부터 간간이 일어난 살인까지, 기억하지 못한다고 알리바이는 성립되지 않았다. 나는 나의 밤을 통제할 수 없었다. 몽유병 환자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매일 밤 희생자를 찾아 헤매는지 몰랐다. 어쩌면 나의 소행일지 모를 잔혹한 소식 앞에, 언젠가 추궁하러 찾아올 집행인을 상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나는 무의식의 바닥까지 불길한 존재였다. 아들을 바랐던 부모의 기대를 저버린 태생부터 순종의 미덕을 체화하지 못하는 모난 성정까지, 태초부터 감염되었을 여자라는 죄책감은 지칠 줄 모르고 자라났다. 자신의 잘린 다리를 찾으려 여자를 따라잡는 전설 속 남자 시체의 환영은 또 다른 악몽의 축이었다. 자르고 떨쳐내도 끝내는 따라잡는 시체들은 증식을 거듭했다. 얼굴조차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사내의 다리를 상상 속에서 절단했다. 어디로 삼켜버렸을지 모를 다리의 의미를 새롭게 반추하게 된 것은 성인이 된 이후였다. 세상의 넘쳐나는 남성적 욕망의 담론 속에서, 나의 욕망은 매번 어긋나거나 적절하지 못하다는 꼬리표를 달았다. 이어지는 판명 속에서, 아이답지 못했고 여자답지 못하기에 차라리 다른 세상으로 탈출하는 길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존재만으로 무거워지는 원죄의식에 허덕이느니 나서서 욕망하다 달아나길 꿈꿨다. 결핍하여 욕망하는 것이 아니라, 탐식하기에 더욱 부풀어 오르기를. 한때는 대책 없는 사랑에 빠져 도피를 꿈꾸기도 했지만, 제자리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저 멀리 어느 곳에서 내민 손을 잡고, 보란 듯이 구원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을까. 재투성이 아가씨를 알아봐 주고 새 옷을 입혀줄 남자를 만나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보고 싶었을까. 몇 차례의 시도 끝에 깨달았다. 낭만적 사랑의 신화 속 구원의 남성상은 그들만의 환상이었다는 걸.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이야기는 매번 미완으로 끝났음이 판명났다. 애초에 남자는 여자를 구원할 수 없으니까.

어릴 적부터 소설을 읽어 치우는 버릇이 생긴 것은, 비릿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던 까닭도 있었지만, 나와 다르지 않은, 대책 없이 욕망하고 어긋나는 누군가의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러나 여자의 욕망과 호기심은 이야기 속 어디서나 대가를 치렀다. 판도라는 호기심의 대가로 세상을 고통으로 몰아넣고, <에덴의 동쪽> 속 욕망하는 어머니는 아들을 그 값으로 치른다. 안나 카레니나의 사랑은 달리는 증기 기관차 앞에 몸을 던지게 하고, 채털리 부인의 불륜은 성불구 남편과 원시적 사랑을 대표하는 연인의 대비 속에서 정당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내가 보는 나는, 불행하지 않아도 욕망했고 정당하지 않아도 욕망했다. 물론, 그 대가를 미리 가불한 할당금처럼 쓰고 더불어 턱없이 불어나는 이자까지 지불해야 했지만.

지난 여름 한국 방문 기간 동안 여성들만의 모임을 꾸린 적이 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수십 명의 각기 다른 나잇대 여성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자기소개시간만으로 주어진 시간인 두 시간을 그냥 넘겨버렸다. 여기저기 긴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았다. 다양한 이야기 속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었다. 20대 초반부터 오십을 넘는 나이까지, 그녀들은 모두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엄마로 상징되는 여자의 삶은, 그들의 딸들에게 닮고 싶지 않은 서사이자 다시 쓰고 싶은 역사이기도 했다. 여자는 엄마의 딸로 태어나, 엄마를 닮지 않은 여자를 소망하며, 또 다른 엄마가 되고 싶지 않은 딸을 낳는다. 반복되는 고리 앞에 누군가는 눈물을 쏟고 누군가는 분노했다. 나를 비롯한 세상의 많은 여자는, 맞닿아서 애처롭지만 닮고 싶지 않은 어머니와 여성상 속에서 자라났다. 소설 <비행공포> 속 작중 화자인 30대 초반 작가 이사도라의 말처럼, '우리가 숭배하는 모든 여성들은 노처녀이거나 자살했다. 과연 그게 우리가 가야 할 길인가?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남자를 찾는 우리의 여정은 계속되었다.' (에리카 종 저/이진 역 | 비채, 2013년 10월 14일)

1970년대를 풍미한 에리카 종의 <비행공포>는 여성의 욕망과 자유에의 탐색을 자기 고백적 서사를 통해 적나라하게 다루었다. 왜 하필이면 여자들의 서사는 이토록 욕망에 집착하고 자의식에 사로잡힌 이야기로 가득할까 고민하던 나에게, 이 소설은 기존의 어떤 책도 주지 못한 빛을 보여 주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잘못 쓰였음을, 애초에 어긋나게 시작되어 서술되었음을 깨닫는 곳에서 여자의 서사가 시작된다. 나로부터 다시 쓰는 일을 해결하지 않고는, 바닥부터 들쳐내고 근원부터 탐색하지 않고는 태생부터 부정이자 결핍인 자로 남아 헤맬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서사를 통해 배운 여자의 욕망이란 나를 설명하기에는 터무니없기에, 아니라고 말하는 곳부터, 나를 다시 쓰고 나로 부활하는 것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작중 화자인 이사도라는 말한다. 오르가슴을 D.H. 로렌스를 통해 배웠고 여자의 보지는 자지의 결핍으로, 그리하여 채워져야 하는 존재로서 자랐음을. 그러나 채털리 부인의 오르가슴은 현실에서 맞닥뜨린 시시한 절정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프로이트가 말한 페니스의 결여 대신 여성이 가진 '전천후 보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를. 그리고 소통이 막힌 결혼생활 속 아내, 유대인 생존자의 핏줄, 실패한 예술가라는 자의식에 시달렸던 어머니의 딸 등, 그녀를 규정하는 조건들을 성찰함으로써 이사도라가 도달하는 곳은 자신의 이야기를 써내려야겠다는 결연한 다짐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사랑과 욕망의 비틀어진 얼굴을 날것으로 드러내지만, 그것이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고착화하고 정당화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사라진 성배를 찾고 세상을 구원할 실마리를 찾는 퀘스트를 사생활의 영토로 이동시켜, 사적 영역과 세계의 경계를 넘나드는 여정으로 재탄생 시킨다. 자신의 삶은 제의의 제물이 되고 타오르는 연기 속 실재와 허구의 구분은 지워진다. 버지니아 울프, 실비아 플라스, 카슨 맥컬러스와 같은 자기 고백적 서사의 천재들을 소환하고 그들처럼 개인의 삶과 구원을, 관습과 제도, 사회라는 맥락을 읽고 해석하고 전복하는 과정을 거쳐 그녀만의 서사로 구현한다.

이사도라는 안정적 삶의 상징인 남편 베넷을 떠나 정신분석학회에서 만난 새 연인 에이드리언을 따라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수차례 실패로 마감된 이전의 연애담처럼 새로운 모험도 허무하게 끝이 난다. 에이드리언으로부터 느닷없는 이별을 통고받는 이사도라는 "유혹당하고 버려지는" 피해자로서 자신의 연애담을 마무리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기 분열적 자의식과 지치지 않는 성찰의 에너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뻔하디뻔한 피해자의 결말로 끝내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아직 비상에의 공포를 극복하지는 못했을지라도, 비행공포를 자신의 목소리로 발화할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난다. "에이드리언에겐 나를 구원할 의무가 없었다. 나는 이제 그 누구의 아기도 아니었다. 해방된 여자, 완전히 자유로운 여자. 그건 내 평생 겪은 그 어떤 경험보다도 두려웠다." (에리카 종 저/이진 역 | 비채, 2013년 10월 14일)

연인을 통한 구원에의 기대를 버리자 떠난 연인을 받아들일 수 있었고 그녀는 비로소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견디어야 할지에 집중한다. 부모의 딸에서 남자의 아내로, 남자들의 여자로 살아가기를 멈추고 독립된 자아로 비상하는 공포와 환희를 맞이한다. 비록 그것이 일시적 환상이자 잠깐의 휴식에 불과할지라도. 그녀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도식적 분류, 일시적 화합 혹은 버려진 자의 고통과 환멸의 서사 속에 자신의 이야기를 서둘러 정착시키기를 거부한다. 여자는 자신이 버린 남자의 욕실로 몰래 숨어들어와 목욕의 제의를 치른다. 그녀가 다시 머물지 혹은 떠날지 알 수 있는 자는 없다. 명확한 것은, '비굴해지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적어도 이야기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것이다. '살아남는 건 자꾸만 다시 태어나는' 걸 의미했고 그녀는 남자의 욕조를 잠시 빌려 재탄생의 분비물을 씻는다. 이야기는 다시 그 자리에서 시작되고 확산될 것이다. 운 좋게 그 소설을 읽는 자는 다만, 그녀의 재탄생은 스스로 탯줄을 떼고 당당히 두 발로 걸어 나가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구원은 저 너머에서 오지 않는다. 우선은 다시 태어나서 스스로를 다시 쓰는 일에 전념할 것이다.

* 이 글은 "악스트(Axt)(2015 9/10월호 no. 002, 은행나무"에 수록되었던 글을 일부 수정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