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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04일 12시 2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12월 04일 14시 12분 KST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판례는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꽤 일관되게 판단하고 있다. 죽기를 결사하고 반항했으나 채 항거하지 못하고 당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원하지 않는 성폭행을 당하여서 상대방을 고소했어도 상대방이 '강간을 한 것은 아니라며', 그 이유가 당신이 더 반항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은 탓이라며 강간죄의 무죄가 선고되는 꼴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니 12세 소녀가 너무나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녀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유를 들어 이를 강간이 아니라 미성년자의제강간으로 기소하는 것이다.

연합뉴스

제297조(강간)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을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

형법 제297조 강간죄의 객체가 되기 위하여서는, 다시 말해서, 당신을 어거지로 성적으로 범한 자가 강간범이라며 위와 같이 3년 이상의 유기징역으로 처벌해 달라고 주장하기 위하여서는, 당신은 여자이거나 트랜스젠더여야 한다. 즉, 당신이 남자라면 당신은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의 객체가 되지는 않는다. 2012년 형법 개정 이전에는 강간죄의 객체는 부녀(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마친 자, 즉 소위 트랜스젠더도 판례에 의하여 인정)였다. 이것이 개정으로 인하여 사람으로 바뀌었으므로, 일견 남자도 강간죄의 객체가 되는 것처럼 바뀌었지만, 여전히 강간이 되려면 가해자가 자신의 성기를 피해자의 성기에 넣었어야 하기 때문에 남자는 강간죄의 객체가 되지는 않는다 (결국 왜 개정을 했는지 약간 의문이 생기기는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당신은 죽도록 반항을 했어야 한다. 강간죄의 요건에 폭행 또는 협박이 들어가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대한민국의 판례는 강간죄가 성립되기 위한 폭행·협박은 '피해자의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고 꽤 일관되게 판단하고 있다 (대법원 2000. 8. 18. 선고 2000도1914 판결 등). 또한 이 폭행·협박의 정도를 판단하기 위하여 판례는 피해자가 강간을 당하기 전후의 상황 및 피해자의 반항 정도를 본다. 피해자가 범인에게 담배를 빌려 피웠거나(대법원 1992. 4. 14. 선고92도259 판결), 시아버지(!)에게서 걸려온 전화에 대고 적극적 구원을 요청하지 않았거나(대법원 1991. 5. 28. 선고91도546 판결), 단지 몸부림치며 저항한 정도였거나(대법원 199. 12. 11. 선고90도2224 판결) 뭐 이러면 강간이 아니라고 보는 등이다. 즉, 다소의 강제력이 수반되었더라도 피해자의 반항 정도가 약하면 이는 강간이 되지 않는다, 뭐 이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이와 같은 태도에 비추어 볼 때, 강간을 당했다고 인정을 받으려면 엄청나게 반항을 하다가 몇 대 맞고 항거불능의 상태가 되거나 아니면 목에 칼날이 들어와 항거가 아주 곤란하거나 아예 불가능한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시 정리하면, 당신은 자연적 성별이 여자인 자거나 여성으로 성전환한 자이어야 하고, 범인의 성기가 본인의 성기에 삽입되었어야 하는데, 이를 막으려고 죽기를 결사하고 반항했으나 채 항거하지 못하고 당했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원하지 않는 성폭행을 당하여서 상대방을 고소했어도 상대방이 '강간을 한 것은 아니라며', 그 이유가 당신이 더 반항을 할 수도 있었는데 하지 않은 탓이라며 강간죄의 무죄가 선고되는 꼴을 보게 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러니 12세 소녀가 너무나 무서워서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라도, 소녀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유를 들어 이를 강간이 아니라 미성년자의제강간으로 기소하는 것이고. 형법 제305조의 미성년자의제강간은 만 13세 미만 자와 성행위를 하는 것을 무조건 처벌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녀가 하필 그 날이 만 13세가 되는 생일이었다면, 이 소녀는 강간의 피해자도 아니요, 미성년자의제강간의 피해자도 아니다. 죽을까봐 반항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참말로 대단하다. 아들은 군대 때문에 무섭고 딸은 강간 때문에 무섭고. 이거 어디 자식 키우겠나 말이다.

영국의 경우, 만일 의도적으로 상대의 성기, 항문, 입에 자신의 성기를 삽입하였는데 상대가 이에 동의하지 아니한 경우 또는 상대가 동의하였다고 믿을 만한 합리적인 사유가 없는 경우, 이를 강간으로 본다. 게다가 이 동의는 자기 의지로 해야 하고 동의를 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와 같은 정의를 택한다면 저 12세 소녀에 대한 범인의 행위는 그냥 강간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제발 그러니 강간죄의 성립요건에서 폭행·협박을 좀 빼자고. 강간 당시 얼마나 세게 폭행이나 협박을 하는지 또는 반항을 얼마나 했는지 아닌지를 사유로 강간이냐 아니냐를 판단한다는 것은 사실 매우 비합리적이고 전근대적이다. 이 사건에서 보듯이 겁에 질린 미성년자의 경우, 여러 상황에 의하여 반항을 포기하는 경우, 장애가 있어서 아예 반항을 못하는 경우 등은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아니 그리고, 목숨 걸고 반항하라고 하다니, 정조를 지키거나 혀를 깨물고 죽어라, 그러던 시대냐 말이지(그러나, 겨우 열두살 먹은 아이가 강간을 당하고 집에 왔는데 아버지는 거기다 대고 멍청하게 소리도 못질렀느냐고 했다거나, 아이가 강간을 당했다는 사유로 인하여 엄마가 약을 먹고 죽으려고 했다는 걸 보니, 한국사회에서 정조는 아직도 목숨보다도 더 중요하고 가문의 명예가 걸린 일인가보다).

단순하다. 상대가 동의하지 않은 성행위는 강간이다. 남자건 여자건 술을 마셨건 어떤 상황이건 말이다.

그러나 일단은 대한민국에서는 그냥 조심해서 사는 수밖에 없겠다. 다만, 물론 예외적인 판례도 가끔 있으므로 (피해자가 사력을 다하여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강간죄 성립을 부정해서는 안된다는 2012. 11. 8. 선고 2012노2080 판결), 함부로 판례를 믿고 강간을 하려고 나서면 곤란하다는 점을 경고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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