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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6월 09일 06시 0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6월 09일 14시 12분 KST

제도와 심성

제도가 빗나가면 많은 구체적 삶들이 고단해진다. 제도의 파급력은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어서 그것이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고통의 규모는 사적인 연민이나 자선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다. 정말 심각한 일은 왕왕 제도(혹은 그 부재)가 개인들의 심성 자체를 타락시켜 집단적으로 죄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국가가 노예제를 허용하면, 사람들은 인간을 소유하고 매매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며, 히틀러체제하에서는 수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한 독일 중산층 사람들이 대거 잔혹한 인종정책에 기꺼이 앞장섰다. 토지공개념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땅 투기는 매우 유용한 재태크가 될 것이며, 사유재산이 가장 우선적 가치로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노동의 경영참여는 천부당만부당한 요구일 뿐이다.

Shutterstock / maigi

내가 잠시 머물고 있는 영국 에든버러에는 런던과 달리 그야말로 빈 손이 전부인 전통적 걸인들이 많다. 번화가든 뒷골목이든 한 블록 건너 구걸하는 이와 마주친다. 사람들은 불어난 동구 이민자, 마약 상용자 혹은 천성이 게으른 자 아니면 위장 거지라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지만, 빈민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무료급식소 운영자와 봉사자들은 그들 대다수가 각각의 곡절이야 어떠하든, 복지국가마저도 외면한 절박한 사람들이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대처시대 이후 긴축, 민영화, 탈규제가 대세로 되면서 시장에서 밀려난 사람들은 늘어나는데, 복지급여의 규모는 축소되고 급부요건은 까다로워지고 복지수요자들을 겨냥한 종종 과도하고 부당한 감시와 제재가 많아지면서, 느닷없이 거리로 나앉은 사람들의 숫자는 급격히 증가했다.

우리는 '희생양의 정치'에 가담하고 있는가

제도가 빗나가면 많은 구체적 삶들이 고단해진다. 제도의 파급력은 광범위하고 무차별적이어서 그것이 체계적으로 양산하는 고통의 규모는 사적인 연민이나 자선만으로는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다. 정말 심각한 일은 왕왕 제도(혹은 그 부재)가 개인들의 심성 자체를 타락시켜 집단적으로 죄의식을 마비시킨다는 점이다. 가령 국가가 노예제를 허용하면, 사람들은 인간을 소유하고 매매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못하며, 히틀러체제하에서는 수많은 기독교도를 포함한 독일 중산층 사람들이 대거 잔혹한 인종정책에 기꺼이 앞장섰다. 토지공개념이 제도화되지 않으면 땅 투기는 매우 유용한 재태크가 될 것이며, 사유재산이 가장 우선적 가치로 신성시되는 사회에서 노동의 경영참여는 천부당만부당한 요구일 뿐이다. 이기심이 제도화된 사회, 이기심이 결국 조화와 균형을 이룬다는 저 '합리적' 정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CCTV 같은 감시장치에만 길들여진 습성은 독재가 들어서면 또 그것과 쉽게 타협할 것이다.

『차브들: 노동계급의 악마화』 오언 조운스 (원본 표지:좌/ 한국어판:우)

이와 관련하여 최근 차브(Chav)라는 조어가 회자되는 것도 흥미롭다. 그 어원은 분명치 않지만 거기에는 갈수록 넘쳐나는 빈자를 피해자 아닌 가해자, 사회의 해충으로 조롱하고 비난하는 뜻이 담겨 있다. 그 단어는 얼마 전에 출간된 『차브들: 노동계급의 악마화』란 책을 통해 새삼 다시 주목을 받고 있거니와, 저자인 오언 조운스는 소위 '계급(정치)의 소멸' 담론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깊어가는 계급갈등의 현실에 대한 "영국사회의 침묵의 음모"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책을 저술했다고 밝힌다. 우리 모두 '희생양의 정치'에 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걸인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건강한가

제도는 상식과 통념을 만들고 그로 인해 다시 스스로를 강화해 간다. 신자유주의적 정책이 활개를 치면서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계산하는 공리주의적 산술은 제도를 넘어 암묵적인 사회적 통념으로 우리를 압박해 왔다. 그리하여 빈민들의 고통이 다수의 안위라는 명분으로 정당화될 때, 복지제도는 축소돼야 옳고, 다수의 소비자를 위해 값싼 물건을 공급할 수 있다면, 노동자의 노동조건이나 중소상인들의 이해는 희생되어도 마땅하다. 사회를 비인격적 개인들로 조각내고 다시 기계적으로 합산하는 그 못된 습성에 비춰보건대, 어쩌면 우리는 찰스 디킨스가 『하드 타임스』에서 그린 빅토리아 초기의 야만적 산업화단계에서 한 치도 더 나가지 못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공공선이나 정의, 평등 같은 '관계적 가치'는 객관적으로 계산될 수 없는 부자연스러운 것으로서 애초에 고려에서 제외하거나 아예 위험시하는 논리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았다. 이런 논리는 가난을 의존문화나 성품과 태도의 문제로, 노동윤리와 책임의식의 실종 탓으로 환원한다. 빈자의 권리가 타인의 재산권을 '탈취'한다는 수준에서 논의하는 사회가 새로운 미래를 구상할 도덕적 상상력을 자극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오늘날 과연 빈자와 걸인에 대한 우리 내면의 시선은 얼마나 건강한가.

우리는 길거리의 걸인을 대할 때 보통 자신도 모르게, 상대가 도움을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deserving poor)인지, 나의 자선이 그의 구걸행위를 연장시키는 것은 아닌지, 내가 위장된 구걸행위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등등 복잡한 상념에 부딪친다. 미국과 서유럽 유수대학들의 학생회가 다투어 초청하는 명강사이며, 내가 보기에, 파스칼, 키르케고르, C.S. 루이스를 잇는 금세기 최고의 기독교변증론자인 뉴욕의 팀 켈러는 걸인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해 이렇게 질문한다. 과연 예수는 내가 자격이 있어서 이 땅에 왔으며, 십자가 죽음 이후에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인류가 겪을 엄청난 혼란, 갈등, 소동을 몰랐기 때문에 그 길을 걸었는가. 그리하여 그는 걸인을 향한 우리의 자선행위가 때때로 속고 낭비되고 배반당한다 할지라도, 선한 사마리아인이 그랬듯이, 상대의 처지를 재며 반응(reaction)하기보다는 우선 행동하라(act!)고 권고한다. 우리가 어느새 친숙해진 기득권층의 담론에 치어 이리저리 망설이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사이에, 우리의 내면이 먼저 피폐해지는 것은 아닌지 정직하게 따져 볼 일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