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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2월 06일 08시 25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4월 08일 14시 12분 KST

불통, 냉전의 유산

정작 문제는 '소통의 부재'란, 어디서 기인했건, 결코 중립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 부재가 온존, 강화되는 사이에 한 사회의 권력과 부의 배분상황은 갈수록 뒤틀린다. 가령 우리는 분단 70년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어떻게 고착시키고, 기득권층과 사회경제적 약자 간의 권력적 편차가 어떻게 제도화되는지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난이 개인의 성품문제가 되고 불평등이 성장과 효율의 이름으로 방어되고 정당화되는 풍토와 관행에 슬며시 익숙해져 있다. 잘못된 구조가 낳은 가장 큰 폐해는 피해자마저도 가해자 윤리를 추종하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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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과 불평등이 심각한 수준인데도 긴축이 시대적 대세가 되고 있다. 언론이 정부부채 문제를 과장하고 호들갑을 떨며 복지축소와 부자감세를 외치는 와중에도 저 광기의 군사비 지출에 대해서는 다들 함구한다. 신자유주의가 드리운 그늘이 그만큼 넓고 짙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난 1월 초 보스턴에서 열린 '평화와 안전을 위한 경제학자들' 모임의 올해 주제는 '제2차 냉전의 예방'이었다. 영국의 경제사학자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기조연설에서 "절박한 의료, 교육, 복지서비스를 고갈시키면서 '상상된 위험들'을 경계하기 위해 수천억 달러를 쏟아붓는 일의 사악함"을 질타했다. 그가 염두에 둔 주된 상상된 위험은 러시아 팽창주의였다.

피해자마저 가해자 윤리를 추종하게 만들어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냉전의 주춧돌을 놓았다는 조지 케넌은 죽음을 몇 년 앞두고는 냉전이 지속된 이유가 서방이 '무조건 항복'에 버금가는 것을 얻을 때까지 소련과의 협상을 거부했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그는 묻는다. 1952년과 54년 소련이 독일의 중립을 전제로 독일통일을 용인했고, 1954년에는 모든 체제에 열린 보편적 유럽집단안보조약을 제안했으며, 1955년에는 흐루시초프가 나토 가입을 신청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 몇 명인가. 바르샤바조약이 체결된 1955년은, 나토 창립 6년 후 이 모든 제안들이 거절된 직후였다.

스키델스키는 또 질문한다. 고르바초프가 나토를 독일 밖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찬성했고, 나토와 바르샤바조약을 대체할 새로운 대서양-유럽 집단안보체제를 제안했다는 사실, 그리고 2001년 푸틴이 러시아의 나토 가입을 원했다는 점을 아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한 사회가 외부의 적과 대립하거나 그것을 상정할 때, 정보의 흐름은 쉽게 차단되고 편향된다. 물리적 교전시는 물론이려니와, 이데올로기의 싸움이라는 냉전의 경우 또한 그에 못지않다. 말과 사상의 긴장을 조성해야 하니, 냉철한 계산보다는 도덕적 담론, 곧 상대진영을 가능한 한 악마로 채색하고 그에 비해 이쪽은 천사로 정당화하는 일이 앞선다. 진실이 호도되고 선전이 진실로 회자되는 일이 그렇게 일상화된다.

정작 문제는 '소통의 부재'란, 어디서 기인했건, 결코 중립적이 아니라는 데 있다. 무엇보다 그 부재가 온존, 강화되는 사이에 한 사회의 권력과 부의 배분상황은 갈수록 뒤틀린다. 가령 우리는 분단 70년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 구조를 어떻게 고착시키고, 기득권층과 사회경제적 약자 간의 권력적 편차가 어떻게 제도화되는지를 속수무책으로 지켜봐야 했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우리는 가난이 개인의 성품문제가 되고 불평등이 성장과 효율의 이름으로 방어되고 정당화되는 풍토와 관행에 슬며시 익숙해져 있다.

잘못된 구조가 낳은 가장 큰 폐해는 피해자마저도 가해자 윤리를 추종하게 만든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가 일련의 권위주의체제에 길들여지면서 오히려 그것을 찬양하는 일종의 '스톡홀름 증후군'에 갇히게 된 것, 신자유주의가 지배적 담론과 관행이 되자 너도나도 지대추구와 약육강식의 경쟁논리에 사로잡히게 된 것이 그래서 가능해진다. 죄의식이 집단적으로 실종될 때 개인들의 일탈은 기껏 CCTV에 의해서만 제어될 수 있을 뿐이다.

민주화도 결국 소통을 제도화하자는 것

물론 구조가 악하면, 사람이 제도의 공백을 당분간 메울 수 있다. 제도가 타협의 산물이고, 한국처럼 타협 자체가 원천적으로 힘겨운 극심한 힘의 불균등 상황에 놓인 사회일수록ㅡ이 상황에서 '사회적 대타협' 운운은 얼마나 안이하고 무책임한가!ㅡ더욱 그러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점에서 한국의 대통령을 제왕적이라고 비판하는 일은 부적절할지도 모른다. 이행단계에선, 즉 좋은 제도가 들어설 때까지, 우리에겐 영웅적 권력자가 필요할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녀)에게 잠시나마 자리를 내주는 이유는 그(녀)가 치열한 자기성찰과 소통으로 스스로를 부단히 경계하고 단속하는 경우에 한한 것이다. 용단이 또한 영단이 아니라면 그것은 치기요 만용이기 쉽다.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에서 형사 자베르는 장발장에게 이렇게 말한다. "친절을 베풀기란 쉬운 일이지. 어려운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것일세." 그러나 자베르는 과잉된 도덕적 열정이나 사명감에 사로잡힌 맹목적 정의감이 실제론 얼마나 위험한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하물며 그것이 사적 수준이 아닌 공동체의 진운과 관련된다면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주화도 결국 소통을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적폐라면, 아마 권위주의 시절의 불통의 역사가 만들어 놓은 적폐가 으뜸일 터인데, 과연 우리에게 민주화는 일단락된 문제인가.

* 이 글은 다산연구소의 다산포럼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