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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14일 13시 02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2월 15일 14시 12분 KST

선진국 극우정치, 파탄의 한국정치

Jonathan Ernst / Reuters

트럼프 식의 신고립주의는 미국이 주도한 세계화시대의 종언을 의미하는가. 그간의 세계화는 노동의 발은 묶되, 상품과 자본의 국가 간 이동은 푸는 데 초점을 둔 것으로, 현실사회주의가 붕괴하면서 "대안은 없다" 류(類) 구호와 더불어 거침없이 진행돼 왔다. 베를린장벽 붕괴 이후 가장 큰 사건이라는 브렉시트 결정과 트럼프 현상은, 세계화 흐름을 선도하던 영미자본주의가 오히려 먼저 나서서 거기에 제동을 거는 기이한 모양새를 보여준다. 사람들 이동이 난민(refugees)이란 가장 적나라하고 급작스런 방식으로 선진국들의 국경을 위협하면서 이주노동 문제가 새삼 부각되고, 후발산업국들에게 매력적일 보호무역주의가 이른바 '4차 산업혁명'의 주도국인 미국에서 먼저 광범위하게 먹히고 있다.

그간 반세계화 외침은 주로 진보진영의 몫이었다. 가령 피에르 부르디외(1930~2002, 프랑스 사회학자)는 방치된 세계화가 몰고 올 파국을 거대한 유성이 지구를 향해 돌진해 오는 것에 빗댔었고, 폴 크루그먼(1953~, 미국 경제학자)은 세계화시대의 체제경쟁을 "바닥을 향한 편집광적 질주"로 비유하며, 모든 나라가 더 싼 임금, 더 낮은 세금, 더 많은 규제완화를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가운데 국가복지와 더불어 보통사람의 삶의 질은 최저 수준으로 수렴하리라 전망했었다. 세계가 40:30:30에서 20:80, 급기야 1:99 운운의 사회로 접어들고 있다는 진단과 최근의 금융위기는 이들의 예측을 현실로 뒷받침한다.

세계화 위기, 오히려 극우에 기회를 주다니

진보의 반대에도 끄떡 않던 세계화가 애초에 그것을 앞장서서 부추겼던 우파진영의 강력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 오늘의 역설이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 위기에도 불구하고 선진국 정치에서 좌파는 일제히 내리막길을 걷고 자국 우선주의를 앞세운 급진적 우익세력이 꾸준히 힘을 얻고 있다. 지난 유럽의회 선거에서 후자는 많은 나라에서 사회민주당 계열을 앞질렀고 영국, 덴마크, 프랑스에서는 최다득표를 기록했으며, 오늘날엔 유럽의회 전체의석의 20% 이상을 점유하고 있다. 국내정치도 다르지 않아 가령 현재 오스트리아, 프랑스, 헝가리, 스위스에서 반유럽연합을 표방한 극우정당의 총선득표율은 20%를 상회한다. 브렉시트를 맨 앞에서 선동했던 영국독립당은 지난 총선에서 전통의 자민당을 제치고 득표율 제3당 지위에 올라섰고, 경제 애국주의를 표방하며 유럽연합 탈퇴를 제1의 공약으로 내건 프랑스 국민전선 마린 르펜은 30%에 육박하는 여론지지율로 가장 강력한 대선후보 중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세계화로 인한 폐해는 일차로 시장논리를 견제할 지구적 수준에서의 정치적 제어장치가 부재하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세계정부는 없고 IMF나 세계은행 등 경제조직 혹은 유럽연합 등 지역통합체들은 만성적인 민주적 결손에 시달리며, 서유럽과 미국, 캐나다의 인구를 다 합쳐도 중국이나 인도 한 나라 인구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에서 인구비례 혹은 진정한 의미의 1인 1표 원리가 관철되는-가령 세계의회 같은-민주적 통제장치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 순진한 발상이다. 원래부터 세계체제란 어떤 외양을 갖든, 강대국 중심의 위계체제에 불과하기 십상이거니와, 세계화 추세를 제어하고 폐해를 교정할 수 있는 주체는, 가장 큰 생산자집단인 노동이 절차적 평등원리에 의해 자신의 목소리를 정치에 반영할 수 있는 국민국가뿐이다.

작금의 우파 포퓰리즘이 주도하는 대서양 양안의 반세계화 흐름이 우려되는 것은, 그것이 인종, 종교, 성 등 원천적으로 타협 불가능한 정체성정치에 기대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국가로의 회귀 조짐이 계급권력의 타협을 전제하는 민주주의의 복귀를 시사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거짓과 억지가 횡행, 핵심쟁점은 뒷전

그리하여 문제는 다시 민주주의다. 한국은 종교, 인종, 언어 등 정체성 요인들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어쩌면 축복받은 나라다. 그런데도 우리가 오늘 목도하는 것은 민주주의 이전에, 정치 자체의 파탄이다. 후진적 정당조직/체제, 대표성 취약한 선거제도 등 핵심쟁점들은 아예 뒷전인데 엉뚱하게 죄없는 정부형태를 붙들고 법석을 떤다. 배운 사람 천지인 청와대 안팎에선 주술에 취한 듯 거짓과 억지가 버젓이 공론장을 뒤덮어도 그것을 옹위하는 테러에 가까운 말들은 연일 백주를 횡행한다.

채만식의 『탁류(濁流)』에는 3년제 여학교를 마쳤으면서도 남자들에 속고 치이며 애비도 모르는 어린 자식과 친정 식구에 매여 외골수로 인생을 사는 주인공(초봉)이 나온다. 평론가 김윤식은 저자가 "교육이나 교양이 순응과 출세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 식민지교육의 무용성을 지적한다고 말한다. 일제와 거듭된 독재를 거치면서 기왕의 지식위주 보상체계는 더욱 견고해지고, 판검사, 교수가 되기 위한 절차탁마의 세월, 그 농축된 이기심을 단기간에 보상받으려는 기능적 지식인만이 판치는 곳이 한국사회다. 이 거대한 탁류 속에서도, 그나마 민주주의의 실험 속에서 교육받고 자란 세대에 거는 기대가 자못 큰 이유이다.

* 이 글은 다산연구소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