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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4월 03일 11시 09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6월 03일 14시 12분 KST

순문학은 있다

<죽이는 책>. 생존 작가 121명이 자기 인생 단 하나의 장르 소설을 꼽고 그 이유를 글로 썼다. 그야말로 미스터리 장르의 바이블이다. 장장 800여 페이지를 사흘에 걸쳐 완독했고 무척 재미있는 독서였지만 정작 내가 얘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의 훌륭함에 대한 얘기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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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내내 나의 머릿속에 거대한 물음표로 남아 독서를 더 재밌는 방향으로 이끌었던 것은 편집자와 추리소설 작가들이 순문학을 대하는 태도였다. 이 책의 편집자는 책을 시작하는 글 말미에 이렇게 썼다.

"장르 소설과 순문학의 경계는 몇몇 이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명하지 않다."

정말? 순문학과 추리 소설의 경계가 모호하다고 할 수 있을까? 순문학을 신처럼 경배하지만, 한편으론 가끔 햄버거를 탐하는 '비건'처럼 미스터리 소설이나 SF소설과 외도를 벌이기도 하는 나로선, 굳은 신념에 돌을 맞은 격이다.

참여 작가들의 태도도 비슷했다. '대실 헤밋이 헤밍웨이가 받은 노벨 문학상을 못 받은 이유가 뭐냐'고 따지는 듯한 분위기가 책 전반에 흐른다. 심지어 존 반빌이라는 작가는 호색한 조르주 심농을 나보코프에 견주며, 1955년 발표된 <롤리타>가 심농의 <판사에게 보내는 편지>와 매우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롤리타>를 그저 십대 여자애를 쫓아다니는 홀아비의 얘기로 봤다니, 글을 쓰는 작가에게도 '문학'은 이렇게 오독되는가 싶어 가슴이 아플 뿐이다.

그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수 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나 파울로 코엘료처럼 순문학임을 자청하는 저열한 작가들에 비하면 제임스 엘로이나 로렌스 블록이 훨씬 높은 문학적 성취를 이룬 것이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비슷한 위치에 있는 두 개의 산이 같은 땅덩이로 이어져 있다 해도 둘은 결국 다른 산이다. 마찬가지로 추리 소설과 순문학 역시 양쪽 모두에서 정수의 근처에도 못 가본 어설픈 작가들 때문에 경계가 잠시 흐려 보일 수는 있겠으나, 엄연히 다른 산이 아닐까? 게다가 지금 시점에서 바라보면 문학을 대하는 태도 면에서 봉우리의 높이가 꽤 차이 나는 것 역시 사실이다.

'장르 소설을 무시하는 건가?'라며 화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나는 장르문학을 걱정하는 쪽이다. 장르문학은 순문학이 거둬들인 문학적 성취를 너무 늦게 흡수한다. <죽이는 책>에서 조 R. 랜스데일은 레이먼드 챈들러의 문장이 아름답다고 상찬을 늘어놓는다. 그에게 현대 작가들을 거론할 것도 없이, 1860년생인 체호프의 서정적 하드보일드를 경험해보라고 말해주고 싶다. 조셉 핀더라는 작가는 제임스 M. 케인이 '거친 서부 남자들'의 '목소리'를 발견했다며, 마치 작가가 내레이터를 캐릭터화하는 것이 대수인 양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보다 15년도 전에 버지니아 울프라는 신경증적인 여자와 주정꾼이었던 윌리엄 포크너가 그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복잡한 '목소리 소설'을 썼다는 걸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우울함과 천박한 코미디를 절묘하게 조화시킨 스콧 필립스에게 감동하였다는 오언 콜퍼 씨는 반드시 1809년생 고골의 <죽은 혼>을 읽어봐야 한다.

추리소설의 태생 자체도 걸림돌이다. 대부분의 추리소설은 독자들이 계속해서 던지는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나기가 힘들다.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지고 상상했던 일이 원치 않는 타이밍에 들이닥치며 생기는 그 쾌감을 버리고는 '좋은 추리 소설'이 성립될 수 없다. 그러나 치명적이게도 이런 박진감을 살리기 위해서는 책장을 앞뒤로 넘기고 다시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성찰적 희열을 포기해야만 한다. 아마도 장르문학이 순문학의 자양분을 늦게 섭취하게 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어렵고 새로운 방식 역시 박진감을 떨어뜨린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누구보다 명확하게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나누고 싶어 하는 건 순문학 작가들이다. 마이클 로보섬이 치켜세운 덴마크 작가 '페터 회'는 자신을 순문학 작가로 정의한다. 마찬가지로 이 책에 영문도 모른 채 등장한 존 쿳시에게 추리소설 작가냐고 물으면 그는 버럭 화를 낼 것이다. 오르한 파묵도 <내 이름은 빨강>을 두고 추리소설이라고 말한 인터뷰어에게 면박을 준 바 있다. 나보코프 역시 <롤리타>가 범죄 소설의 형식을 빌려왔다는 말에 어이없어했다. 1999년에 `나는 떠난다'로 공쿠르 상을 수상한 장 에슈노도 누가 봐도 추리소설인 작품으로 상을 타 놓고는 자신은 추리소설 작가가 아니라고 발뺌한 바 있다. 추리소설 또는 장르소설 작가들로서는 자존심이 상하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그러니, 질문은 조금 수정되어야 한다. 왜 순문학 작가는 장르 소설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할까? 그건 그들이 원하는 희열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오르한 파묵은 하버드 대학 강연에서 실러의 예술론을 인용하며 소설가와 독자 모두를 제각각 '소박한 사람'과 '성찰적인 사람'으로 나눈 바 있다. 소박한 소설가는 소박한 독자를 위해, 성찰적 소설가는 성찰적 독자를 위해 소설을 쓴다는 것이다. 이를 서사의 장르로 국한해 거칠게 얘기하면, 소박한 독자는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며 소설을 읽고, 성찰적 독자는 작가가 감추어 놓은 '소설의 중심부'(파묵의 표현이다)를 찾으며 '거의 계속 움직여서 잡을 수 없는 그 무엇'(역시 파묵의 표현이다)을 발견하려 애쓴다. 두 가지 독서를 번갈아 가면서 할 수 있을 때, 그리고 소박한 독서로 찾을 수 있는 표면적 주제와 작품의 가장 깊숙한 중심부가 멀면 멀수록 훌륭한 소설이 탄생한다.

장르문학 작가들이 가장 많이 던지는 게 바로 이 질문이다. 순문학에서 말하는 그 '중심부'라는 게 대체 뭐냐는 거다. <롤리타>를 예로 들어보자. 처음 읽은 소박한 독자는 '12살짜리 돌로레스를 보고 군침을 흘리던 홀아비 험버트가 자신의 연인을 빼앗아간 연극 선생을 살해하는 범죄소설'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징'에 익숙한 조금 성숙한 독자가 두 번쯤 읽으면 나이 든 러시아어 작가 나보코프가 아직 어린 미국의 영어를 유린하는 내용으로 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좀 더 문학적인 독자라면 '롤리타, 입천장에 세 번 부딪히는' 어쩌구를 인용하며 그는 글쓰기의 아름다움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리고 고도로 성숙한 독자가 한 서너 번쯤 그 소설을 읽으면 롤리타의 '그 무엇'은 롤리타 서문에 등장하는 '존 레이'는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지에 대한 호기심, '복숭아 틈새'(Peach-cleft)라는 새로운 조어를 받아들이는 혹은 만들어내는 유연함, '비비언 다크블룸'이라는 단어로 전체의 얼개를 이해 할 수 있도록 힌트로 주는 친절함, 그리고 이 모든 걸 조금씩 알아가며 알파벳으로 쓰인, 혹은 한글에 알파벳이 병기된 텍스트의 집합 안에서 '웹'을 찾아내는 순수한 희열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보코프만 그런 게 아니다. 같은 책을 여러 번 읽게 만드는 작품이 순문학에는 차고도 넘친다. 그런 책들을 보면, 지금까지 복합적 재미를 위해 소박한 추리의 형식을 빌려 약간의 박진감을 더해 왔을지언정, 순문학은 성찰적 독서의 레이어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러나 장르 소설에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나 테드 창, 우리나라에선 배명훈 등 몇몇 이름을 제외하면 그 역을 시도한 예는 '아직' 흔치 않다. 그러니 오히려 이렇게 말 할 수 있겠다. 순문학과 장르문학의 경계를 공고히 하는 것은 오히려 장르문학 작가들이다.

*남성 라이프 스타일 매거진 루엘(Luel)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