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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8월 29일 12시 46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8월 29일 12시 46분 KST

언제까지나 영원히 : 24살에 남편과 사별했다

sarah mcbride

"만약 내 병이 불치인 걸로 밝혀지면, 나랑 결혼해줄래?" 이 말은 전통적인 청혼 대사는 아니지만, 뭐, 앤디와 내가 전통적인 삶을 살아온 건 아니니까.

"나의 큰 콩"

앤디와 나는 2012년 6월에 백악관에서 LGBT 커뮤니티를 기리는 리셉션에 참석했을 때 지나가다 서로 부딪혔다. 아메리카 대학 총학생회장이던 나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공개적으로 커밍아웃한지 한 달 만에 운 좋게 초대받았다. 당시 26세이던 앤드류는 그보다 몇 년 전에 트랜스젠더 남성으로 커밍아웃하고 워싱턴 DC에서 주도적인 LGBT 보건 정책 지지자로 활동하고 있었다.

sarah mcbride

나는 두 달 뒤 그 잘생긴 남성이 매력적이고 정중한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기 전까지는 우리의 짧은 '만남'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커피나 술을 함께 하자는 그 짧은 메시지를 몇 시간에 걸쳐 고치고 또 고쳤다고 그의 친구들이 이제 내게 말해준다. 온라인에서 몇 번 대화를 나누고, 내가 백악관에서 인턴을 하는 동안 우연히 몇 번 마주친 뒤에, 우리는 마침내 시간을 내서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우리는 트랜스젠더라는 것 말고도 공통점이 정말 많다는 걸 금방 알게 되었다. 트랜스젠더라는 것은 물론 우리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래도 한 가지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법과 정치에 뜻이 있었고, 그가 '쓰레기 텔레비전'이라고 부르는 프로그램들을 무척 좋아했고, 여행을 좋아했고, 언제나 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우리는 둘 다 영화에 대한 엄청난 관심 때문에 정치에 발을 들였다. 둘 다 스타워즈를 사랑했다. 그의 엄청난 사랑에 비하면 내가 품은 것은 별 것 아니었지만 말이다. 우리는 아기들이 쓰는 말과 별명을 불쾌할 정도로 좋아했다. 그는 '큰 콩', 나는 '작은 콩'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는 나와 사귀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었다고생각한다. 그는 너그럽고, 정이 많고, 똑똑하고, 재미있었다. 일과 놀이의 비중을 완벽하게 조절해 즐겼다. 그가 사랑하던 고향 위스콘신 주 사람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성들이었다.

곧 우리는 언제나 붙어있게 되었다. 우리 관계가 시작된 지 몇 주 만에 그는 나와 내 가족들을 데리고 바베이도스로 여행 갔다. 나는 곧 그의 가족의 일부가, 그는 곧 내 가족의 일부가 되었다. 순식간에 그는 내 파트너이자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가 일하는 미국 진보 센터에서 나도 일하게 되어, 우리는 심지어 동료이기까지 했다. 미래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이상으로 뻗어 있다고 믿었던 우리는 함께 보낼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앤드류가 2013년 9월에 혀에 구강암 진단을 받았을 때 우리 관계는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나는 그 뒤의 몇 개월이 우리가 한동안 견뎌야 할 가장 힘든 시간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러길 바랐다. 10월에 앤디는 12시간 동안 수술을 받았다. 혀 일부를 제거하고 자기 팔에서 뗀 조직을 이식했다. 그는 말하고 먹는 법을 새로 익히며, 방사선 치료와 화학요법을 철저히 받았다. 그는 숨만 쉬어도 찌르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4월에 그는 '암 완치'라는 진단을 받았다. 무섭고 스트레스가 심한 경험이긴 했지만, 그만큼 강한 유대를 만들기도 했다. 우리 나이의 커플이 이렇게 빨리 갖기는 어려운 유대였다. 4월에 긍정적인 결과가 나오자, 우리는 다 끝난 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앞으로의 인생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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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2014년 7월, 그가 첫 진단 이후 새로 쌓아올렸던 세상이 다시 무너졌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고 가슴 통증을 느꼈다. 테스트 몇 번을 받고 잠시 입원한 다음 결과를 들을 수 있었다. 주먹으로 배를 맞는 것 같았다. 앤디의 암이 돌아와서 폐로 번졌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지 24시간 후, 앤디는 내게 물었다. "만약 이 병이 불치인 걸로 밝혀지면, 나랑 결혼해줄래?" 대답은 물론 예스였다.앤디는 늘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이번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 서두를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는 겨우 28세였고 나는 대학을 졸업한 직후였다.

우리가 이 병이 (의사들의 표현을 빌자면) '수명을 단축시킨다'라는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영혼이 박살 난 것도 이해가 되는 일이다. 당시에 우리는 치료를 받으면 1년 정도 더 살 수 있을 거라는 말을 들었다.

그 뒤 2주 동안은 침묵, 불신, 울음으로 얼룩졌다. 정말 많이 울었다. 죽음에 대한 공포로 울었다. 그가 자기 가족들과 친구들이 성장해 가는 것을 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울었다. 그가 말한 대로, 그는 '사랑해, 콩.', '난 네가 자랑스러워, 콩.' 같은 말을 해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울었다.

그리고 가능한 한 최대한 오래 살자, 그리고 충만하게 살자는 결의가 울음을 밀어내게 되면서, 우리는 결혼식을 올려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앤디는 몇 주 안에 수명을 늘리기 위한 화학요법을 받을 예정이었다. 우리는 남은 1년 동안을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식을 10월 중순에 올리기로 잠정적으로 결정했다. 우리 둘 다 늘 가을에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터였다. 가을의 색채, 기온, 워싱턴 DC의 커플로서 습도가 낮은 것 모두 매력적이었다.

"2주? 난 '워크 투 리멤버' 같은 짓을 할 준비는 안 되어 있는데."

그러나 앤디가 지역 병원에 두 번째로 입원한 지 사흘째 되던 날, 치료가 시작되기 2주를 남겨놓은 시점인 8월 14일 목요일에 한 의사가 우리의 계획을 망치고 앤디의 희망에 찬물을 끼얹었다.

"당신이 치료받을 때까지 버티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 의사가 말했다.

내가 우리 아파트에서 샤워를 받고 돌아와 앤디의 병실에 들어가면서 제일 먼저 들었던 말이 이거였다. 모서리를 돌아가니 앤디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럼 내겐 2주밖에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신다는 거예요?" 앤디가 물었다. 그의 얼굴은 그가 다시는 보지 못할지도 모를 위스콘신의 눈처럼 새하얬다.

"네." 의사는 말을 계속하려다 멈추었다. 침묵이 흘렀다. 나는 그가 다음에 무슨 말을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깊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방금 전한 소식의 심각성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잠깐, 파리가 있네요. 내가 잡을게요." 그는 양손을 들어 파리를 죽일 준비를 했다. 계속 정적이 흐르다 큰 손뼉 소리가 났다.

파리 사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의사는 다시 말을 멈추고 "잠깐, 주울게요." 라고 말하며 천천히 몸을 굽혀 파리 사체를 주워 쓰레기통에 던졌다.

나는 의사의 차가움에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이 소식, 그리고 그 소식을 그토록 무심하게 전하는 것에 충격을 받아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1시간 같은 45초가 흐른 뒤, 어색함을 견딜 수 없었던 앤디가 마침내 침묵을 깨고 의사에게 말했다. "잘 잡으셨네요."결국 의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앤디의 폐 하나가 빠른 속도로 망가지고 있다고 알려주었다. "인공호흡기를 달고 살고 싶은지 결정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건 알아두세요. 당신 상태를 봤을 때, 호흡기를 달면 아마 다시는 떼지 못할 겁니다. 그리고 호흡기를 달려면 마취를 해야 하는데, 당신 상태로 봤을 때 아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거예요."

잠시 후 다른 의사가 들어와서 연거푸 사과했다. 그녀는 체액이 부족해서 앤디의 심장이 빨리 뛴다고 생각하고 수액을 과하게 준 모양이었다. 방금 앤디에게 2주밖에 남지 않았다는 말을 했던 의사는 놀란 듯했고, 상황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는 것 같았다. 새로 들어온 심장병 의사는 약을 좀 처방해주고 그의 수액 유입량을 줄였다. 말할 것도 없이 앤디의 상태는 좋아졌고, 그 날 오후에 앤디는 입원한 이래 최고로 몸 상태가 좋아졌다.

두 의사가 병실에서 나가자 우리는 혼란에 빠졌다. 앤디에게 2주밖에 남지 않은 걸까, 아니면 오늘 아침에 급격히 상태가 안 좋아진 것이 쉽게 고칠 수 있는 일시적인 문제에 불과했던 걸까? 앤디는 확신이 들지 않아 나를 돌아보고 말했다. "2주? 난 '워크 투 리멤버' 같은 짓을 할 준비는 안 되어 있는데." 그는 살기 위해 싸워 왔지만, 이제는 그가 겨우 1년을 더 살기 위해 싸우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 뒤로 몇 시간 동안, 두 의사 중 누구도 우리 병실에 돌아와 정보를 더 알려주지 않았다. 우리는 병실에 들어오는 의료진들에게 새로운 정보를 물었다. 간호사, 말기 환자 간병팀, 젊은 입원 환자 전문의 등 모두에게 물었지만 아무도 분명히 이야기해주지 못했다. 앤디가 2주밖에 남지 않은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는데 대체로 의견을 같이했다. 사실 그 날 저녁 앤디는 충분히 안정되어서, 며칠 뒤에 퇴원하기로 정해졌다.

다음 날 앤디의 어머니가 결혼식을 앞당기는 게 어떠냐고 제안하셨고, 나는 그에게 어렵사리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잘 받아들였지만, 날짜를 옮기자는 게 자기 몸의 예후와 관련된 것은 아닌지 걱정했다. 나는 그의 몸 상태가 변해서 날짜를 옮기는 게 아니고, 화학요법이 우리 생각보다 그를 더 힘들게 할 것 같아서라고 설명했다. 결혼식을 꼭 올리겠다고 결심한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자."

"언제까지나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퇴원하고 아파트에 돌아온 첫날, 우리의 친구이자 동료인 진 로빈슨 주교가 우리 아파트에 들러 결혼식을 의논했다. 로빈슨은 모든 기독교 교파를 통틀어 최초의 공개적인 게이 주교다. 진 주교와 한 시간 정도 이야기하고 나서, 우리는 결혼식을 그 주 주말에 치르기로 했다. 겨우 닷새 뒤였다.

지니 주교와 가까운 친구 몇 명이 계획, 실행, 준비를 전부 맡겠다고 제안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결혼 증명서를 발급받고, 내 드레스를 사고, 간간이 결정을 내리는 것뿐이었다. 앤디의 제약 조건을 생각해서, 우리 아파트 건물 옥상에서 결혼식을 올리기로 했다. 50명 정도 올라갈 수 있고, 워싱턴 DC의 멋진 풍경을 360도로 볼 수 있는 곳이었다.

그 뒤 며칠 동안 결혼식 준비는 계속되었고, 앤디의 상황은 점점 더 나빠졌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걷기가 더 힘들어졌고 산소가 더 필요했다. 잠을 점점 더 많이 잤다. 앤디가 5분이면 해치우던 일상적인 일들을 30분, 1시간 동안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가며 해야 했다. 결국, 식사도 그에겐 힘든 일이 되었다. 아이스크림과 약을 섞은 것을 15숟가락 먹는 데 4시간이 걸렸다.

그에게 영양과 수분을 공급하는 끝없는 싸움이 유일하게 잠시 중단되는 것은 내가 그와 결혼식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그런 대화를 할 때면 그가 잠들지 않고 정신을 또렷하게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해 노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며칠 전 진 주교가 성공회 예식을 기본 틀로 한 결혼식 초안을 보내주었다. 나는 앤디의 허락을 받아 훑어보고 우리에게 맞게 고쳤다. 죽음에 대한 언급을 전부 '언제까지나 영원히'로 바꾸었다. 또 그의 상태를 고려하여 우리가 말해야 하는 대사들을 간단한 세 문장으로 줄였다.

"네."

"엄숙히 맹세합니다."

"내 꾸준한 사랑의 징표로 이 반지를 받아주세요."

그가 이 세 문장을 기억하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나는 이 문장 전에 오는 마지막 문장과 함께 적어두었다. 한 시간 정도 결혼식 준비를 한 다음, 나는 침실에서 나와 그에게 우리가 식을 치를 수 있을지 물었다.

그 무렵 앤디는 거의 온종일 잠만 잤다. 그의 행동은 삶이 열 달, 심지어 2개월 남은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일이 주 남은 사람에 가까워 보였다. 나는 결혼식 전체를 그에게 읽어주려 해봤지만, 그는 곧 잠들었다. 그가 일어나자 나는 그가 말해야 할 부분과 그 전의문장들만 읽어주기로 했다. 그중에는 "당신은 언제까지나 영원히 그녀를 공경하고 사랑하겠습니까?"라는 문장도 있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느냐고 묻고, 아무것도 외울 필요 없도록 커닝 종이를 만들어 두었다고 하자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가 머리를 젖히고 다시 꿈을 꾸면서, 나는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에게 뭔가 필요한 건지 알 수 없어서 나는 그의 의자로 가서 몸을 기울여 보았다.

그는 똑같은 말을 계속 중얼거리고 있었다. 잘 들어보려고 몸을 더 가까이 기울이자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언제까지나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언제까지나 영원히..."

"내 결혼식 날."

우리가 결혼식을 올린 2014년 8월 24일의 아침은 사고 없이 찾아왔다. 호흡이 가빠지지 않았다. 음식을 먹는 것은 아주 조금 나아졌다. 일기 예보에선 비가 올 거라고 했지만, 막상 그 날이 되어 보니 8월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날이었다. 온도는 30도 정도에 맑았고, 딱 적당하게 바람이 불었다. 워싱턴 DC가 아닌 곳에 사는 가족들도 찾아왔다. 옛 친구들, 새 친구들은 준비를 하고 흥분해 있었다. 달콤쌉싸름하기는 해도 아름다운 날이 되려 하고 있었다.

결혼식 한 시간쯤 전, 복도 맞은 편 이웃의 아파트에서 준비하고 있는데, 앤디와 가장 친한 친구 하나가 문을 두드렸다. 그는 숨을 헐떡이고 있었고 딱 보기에도 겁을 먹은 모습이었다.

"앤디가 방금 안락의자에서 휠체어로 옮기다 쓰러지고 의식을 잃었어. 정신 차렸고 지금 당장은 괜찮아 보이지만, 경찰을 불렀고 응급 구조대가 오고 있어." 다행히 방사선 종양학자인 내 오빠가 앤디가옷을 갈아입는 동안 같이 있어주기로 하고 와 있었다.

머리를 틀어올리고 웨딩드레스는 벽에 걸어놓은 채 나는 우리 아파트로 달려갔다. 앤디는 안락의자에 앉아있었고 오빠와 우리 친구들이 그를 둘러싸고 있었다. 내가 걸어가자 그는 사과했다. "미안해. 나한테 화났어?"

"당연히 아니지, 콩. 당연히 너한테 화 안 났어."

밖에서 우리 건물로 다가오는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오빠는 앤디가뇌졸중을 일으킨 게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몇 가지 질문했다.

"이름은?"

"앤드류 크레이."

"여기가 어디지?"

"워싱턴 DC의 내 아파트."

"오늘은?"

그는 날짜는 며칠 틀렸지만 이렇게 덧붙였다. "내 결혼식 날."

응급 구조대가 아파트에 와서 의료 장비와 결혼식 관련 물건들을 헤치고 들어왔다. 옆 방에서 케이터링 나온 사람이 결혼식을 위한 소량의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응급 구조대는 심전도 검사를 하고 내 오빠와 상의했다. 앤디는 병원에 가게 되면 우리 결혼식과 화학요법이 어떻게 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지 않겠다고 요지부동으로 버텼다. 바이탈 사인이 정상이라 응급 구조대는 묵인했다.

그들이 떠나자 나는 앤디에게 결혼식을 아파트 안에서 할지, 아니면 그냥 취소할지 물었다. 그는 고개를 가로젓고 말했다. "아니, 제대로 하자."

복도 맞은편으로 돌아오는데, 오빠는 앤디가 휠체어를 타고 옥상까지 갈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앞으로 30분 동안 상태를 보겠다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나의 앤디는 힘을 냈다. 세 명의 도움을 받아 앤디는 정장으로 갈아입고, 산소통을 지니고 옥상까지 올라왔다.

휠체어에 앉은 앤디가 옥상 파티오로 들어올 때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나는 우리 결혼식이 열릴 옥상 탁 트인 곳으로 이어지는 좁은 통로를 지나는 앤디의 휠체어의 뒷모습을 보았다. 피가 섞인 가족, 우리가 선택한 가족들 50명이 모인 곳으로 앤디가 다가가자 불과 1시간 전에 응급 구조대가 우리 아파트에 와서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 했다는 걸 모르는 그들은 환호했다.

앤디는 세상을 정복한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의기양양하게 두 팔을 들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이기를 했다. 친구들이 얼른 휴대용 산소 공급기에서 고정형 산소 공급기로 연결을 바꿔준 다음, 나는 아버지의 팔을 잡고 옥상으로 나왔다.

나는 내 결혼식이 어떤 모습일지 전혀 몰랐다. 우리 친구들은 우리가 원하는 색깔이 무엇인지만 듣고 고작 닷새 동안 전부 준비했다. 아름다웠다. 부케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꽃인 보라색 난초 꽃과 푸른 수국이 들어 있었다. 부케를 준비한 친구는 내가 어떤 꽃을 좋아하는지 몰랐다. 앤디는 꽃에 둘러싸인 흰 텐트 아래에서 우리의 꿈의 진행자, 진 로빈슨 주교 앞에 앉아있었다.

앤디에게 다가가자 그가 목메 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늘 결혼하는 이야기를 했었고, 그는 내게 우리가 언젠가 결혼하게 될 거로 생각하는지 물은 적이 몇 번 있었다.

내 어머니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앤디가 나를 사랑했고, 여생을 나와 함께 보내고 싶어 했다는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하신다. 난 그건 모르겠지만, 우리가 결혼하기 훨씬 전부터도 서로에게 평생 헌신하고 있다는 것은 안다. 그 날의 예식은 우리 사이에서는 이미 현실이었던 것을 가족들과 국가 앞에서 공식화한 것뿐이다. 우리는 이미 피상적인 면에서(리얼리티 TV를 좋아하는 등), 그리고 깊은 곳에서(평등과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 우리는 하나로 묶여 있었다. 우리는 우리 인생 중 가장 힘들었던 시간 일부를 나란히 함께 걸어갔다.

sarah mcbride

다행히 우리는 아무 문제 없이 식을 치렀다. 반지를 교환했고, 서로에게 헌신을 표했다. 그는 아래층에서 커닝 종이를 잃어버려서 즉흥적으로 대답했다. 숨이 차거나 기침이 나오지 않도록 짧게 이야기했다.

사진 몇 장을 찍고 포옹을 몇 번 하자 앤디는 너무 지쳐서 친구들 몇 명과 함께 아파트로 돌아가기로 했다. 나는 옥상에서 다른 손님들과 1시간 더 있은 다음 새신랑과 있기 위해 아래층으로 돌아왔다.

우리 결혼의 첫 36시간은 결혼 직전의 36시간과 아주 비슷했다. 그에게 잔소리하며 음식을 먹이고, 많이 자고, 위안이 되는 리얼리티TV를 아주 많이 보았다.

달랐던 점은 앤디가 결혼식 1시간 전에 겪었던 일을 세 번 더 겪었다는 것이었다. 안락의자에서 휠체어로, 또는 휠체어에서 안락의자로 옮기다 쓰러졌다. 앤디는 예민해져 있었고, 의자를 옮기기 전에불안해하는 게 보였다. 불안해지면 그는 호흡을 조절할 수 없었고 어지러워지고 정신을 잃기 시작했다. 산소 공급을 잠시 높이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정신을 차리곤 했다. 몇 초 안에 그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나를 보았다. 앤디답게 그는 "정말 미안해, 내 사랑. 나한테 화났어?" 라고 물었다.

"아냐 콩, 너한테 전혀 화 안 났어. 정말 사랑해." 나는 매번 대답해 주었다.

"나도 널 사랑해."

다음 날 아침, 신의 은총으로 앤디는 차로 내려가 45분 거리의 존스 홉킨스 병원까지 갈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전 여자 친구인 헤더와 함께 그의 수명을 늘리기 위한 치료를 받으러 갔다.

홉킨스 병원에 도착한 우리는 화학요법을 받기 전에 먼저 앤디의 종양학자를 만났다. 그가 시험실에 들어오자 우리는 상황이 달라졌음을 알았다. 그는 앤디가 여러 번 쓰러졌던 사실은 아직 몰랐지만, 지난주에 했던 혈액 검사에서 우려되는 수치가 나왔다. 그는 우리가 오늘 화학요법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경고하며, 내가 탈수를 막으려고 애썼건만 앤디가 탈수 상태였기 때문에 일단 수액을 맞히러 보내겠다고 했다. 몇 시간 후 그는 앤디를 다시 진찰하고 치료를 해야 할지, 한다면 어떤 치료를 할지 정하기로 했다. 혈액 검사를 더 하도록 지시했고 시험 결과가 나오면 우리를 만나겠다고 했다.

정보를 더 얻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앤디의 상황은 점점 나빠져 갔다. 불과 몇 시간 만에 그가 요구하는 산소는 엄청나게 많아져 갔다. 우리가 있는 곳 밖에서 간호사들이 입원해야 할 환자가 하나 있다고 수군거리는 것이 들렸다.

나는 나가서 간호사에게 어떻게 되고 있는 것인지 물었다. 그녀는 오늘 앤디를 입원시켜야 할 거라고 대답했다. 우리 둘 다 입원하게 되면 수명을 늘려 줄 치료를 받을 수 있을 정도로 건강해질 가능성이 아주 낮아질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나는 그를 무너뜨릴 이 소식을 내가 전해주겠다고 했다. 간호사가 나를 따라왔다. 나는 커튼을 젖히고 그에게 최대한 부드럽게 입원해야 한다고 말했다. 늘 낙관주의자인 그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알았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병원에서 자신을 다시 안정시켜서 화학요법을 받을 수 있게 할 거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나를 안심시키려고 윙크를 하자 곧 종양학자가 돌아와 테스트 결과가 조금 나왔으며 우려되던 수치가 더 높아졌다고 말했다.

몇 분 뒤 나는 밖에서 그와 이야기했다. 그는 곧 삽관, 즉 인공호흡기를 달아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혹시 앤디가 삽관에 대해 바라는 바가 있는지 물었다. 2주 전 파리를 죽인 의사가 암울한 전망을 말해주었기 때문에 그가 더 자세히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삽관하면 앤디는 다시는 뗄 수 없을 것이고, 다시 깨어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얼마나 빨리 결정해야 하는지 물었다. 앤디는 입원해야 한다는 소식도 방금 들었는데, 시간을 더 줄 수는 없을까요? "안타깝지만, 안됩니다."

입원 절차를 받으며 나는 앤디에게 '병실 업그레이드'를 받는 거라고 농담했다. 그 후 나는 앤디에게 '사전 조치가 필요해서' 삽관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했다. 간호사가 우리에게 사전 지시 서류를 가져다주었고, 우리는 결혼 이후 처음으로 마주 앉아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지속적 식물인간 상태로 삶을 계속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해서였다.

그는 10분 동안이나 서류를 바라보았다. 그는 꼭 지금 이야기해야 하는 거냐고 물었지만, 헤더와 나는 의사가 지금 해야 한다고 했다며 다시 '사전 조치'라는 이유를 댔다. 그는 펜을 든 채 몇 분 더 앉아 있다가 마침내 '만약 의사들이 내가 지속적인 식물인간 상태에 있다는 것을 증명할 경우... 내가 다시 의식을 회복할 것이라는 합당한 기대가 없다면... 나를 편하게 해주고 자연사를 허가해달라'는 항목에 표시했다.

나는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어 볼티모어에 와서 우리와 함께해달라고 부탁했다. 앤디의 어머니, 양아버지, 아버지, 내 어머니가 즉시 오셨다. 다음 이틀 동안 열 명에서 스무 명의 사람들이 돌아가며 병원에서 우리 곁을 지켰다. 딱 사흘 전 우리 사랑의 축하 행사를 준비해주었던 사람들이 그가 점점 더 길게 잠자는 동안 그의 병실에서 사랑의 원을 이루었다.

그가 입원한 다음 날, 그는 거의 내내 의식이 없었다. 가끔 그는 의식을 되찾고 우리에게 미소를 짓고 우리 손을 꼭 쥐며 산소를 더 많이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산소를 더 달라는 다급한 눈빛을 하며 손가락을 돌리는 신호를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그에게 산소를 최대치로 틀어놓고 있다고 알려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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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수요일은 앤드류가 의식을 가진 마지막 날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잠들기 직전에 나는 그에게 "사랑해."라고 말했다. 그는 눈썹을 추어올리더니 가진 힘을 끌어모아 세 단어를 말했다. 그 말은 그가 그날 했던 유일한 말이었고, 그가 입으로 소리 내 말한 마지막 말이었다.

"나도 널 사랑해."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이제 아마 시간문제일 거라는 말을 들었다. 간호사는 환자들은 사람들을 실망하게 할까 봐 두려워한다면서, 가끔 환자에게 '가도 괜찮다'고 말해줘야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내가 전날 밤 우리의 친한 친구 하나와 했던 대화와 비슷한 내용이었다. 병실에 있던 다섯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며 모두 '그건 정말 앤디답군.'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리는 한 명씩 돌아가며 몸을 숙여 앤디에게 '가도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그 메시지를 처음으로,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해준 사람은 나였다. 나는 두 번 다 몸을 숙이고 "콩, 사랑해. 널 매일 그리워할 거야. 하지만 넌 가도 괜찮아. 아무도 너한테 화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쓴 쪽지를 그의 꼭 쥔 주먹에 밀어 넣어 주었다. 그때쯤 손은 상당히 싸늘했다. 쪽지에는 '너는 사랑 받고 있어.'라고 적었다.

3시간 후에 그의 바이탈 사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대기실에 있던 사람들을 전부 들어오게 했다. 우리는 모두 서서 그의 산화 레벨 - 폐암 투병하는 사람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수치 - 가 제법 건강한 95에서 85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75. 65. 그의 수치는 치명적인 수준으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는 울며 앤디 주위에 모여 그의 마지막 입원 기간 내내 유지했던 사랑의 원을 만들었다. 무지개 가족 - 게이와 스트레이트, 트랜스젠더와 시스젠더 - 들이 그를 꼭 감쌌다. 그의 호흡이 잦아들었다. 심장박동이 느려졌다. 그리고 28일 목요일 오후 3시 30분, 닷새 전 받았던 포장도 뜯지 않은 결혼식 선물들을 아파트에 쌓아둔 채,앤디는 세상을 떴다.

그 날 밤, 우리 결혼식을 계획하기 위해 모였던 사람들이 모여 그의 장례식을 계획했다. 우리 결혼식을 주재했던 진 주교가 진행을 맡기로 했다. 그의 병상 옆에 나와 함께 서 있었던 사람들이 추모 연설을 하기로 했다. 친척들과 친구들로 구성된 가족이 다시 함께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기로 했다.

" 사람들이 증오할 시간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삶은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은데."

그 주 토요일에 워싱턴 DC의 세인트 토마스 성공회 교회에서 그의 장례식이 열렸다. 진 주교는 그전 주말의 결혼식에 입었던 옷을 입었다. 그는 일요일의 결혼식은 삶과 사랑을 기념하는 행사였고, 오늘 행사도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전국에서 애도를 보내왔다. 워싱턴 DC 시장, 백악관 공무원들, 주 및 전국 단위 평등 단체, 친구, 친척, 지인, 전 세계의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앤디의 이야기와 그의 일에 감명받아 애도를 전했다.

앤디는 자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의 삶의 경험을 통해 남을 도울 수 있는 몇 안 되는 놀라운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타인들의 삶에 기쁨, 의미, 건강, 충만함을 가져다주려 일했다. 그는 진정하게 살기 위해 이 세상의 편협함과 선입견에 맞섰지만, 진짜 자기 모습으로 살기 시작한 지 불과 몇 년만의 암으로 목숨을 잃었다.

그의 죽음에서 나는 여러 교훈을 얻었지만 가장 큰 것은 우리가 천하무적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인지는 결코 알 수 없다는 사실이다.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을 낡은 도그마가 방해하게 하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 앤드류는 진보적인 가정에서 개방적인 친구들과 함께 자랐지만, 우리가 갖고 태어난 한 가지 사실에 기반을 둬 살고 사랑하고 정체성을 규정해야 하는 바깥세상의 기대는 그를 너무나 오랫동안 자기 자신 안에 가둬 놓았다.

20대 초반에 그는 마침내 행복하고 완전하기 위해 용기를 냈다. 암에 걸린 것은 선택이 아니었다. 그의 죽음을 피하려고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의 인생 대부분에 걸쳐 그를 완전하지 못하게 했던 우리 사회의 편견은 선택의 문제이다. 앤드류, 그리고 그저 삶을 최대한으로 살고 싶을 뿐인 모든 사람을 위해, 증오를 멈추고 사랑, 빛, 진정함이 번영할 수 있는 선택을 하도록 하자.

그리고 비극적인 종말에도 불구하고, 앤디는 대부분의 사람이 60년, 80년 걸려서 찾는 목적과 진실함을 가지고 28년 동안 살았다. 그는 사랑하고 또한 사랑받았다. 그는 지위나 이득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친구를 사귀고 멘터링을 했다. 그는 자신이 보여준 용감함을 통해 타인에게 용기를 주었다. 마지막 한 해 동안 암과 싸울 때뿐 아니라, 그가 매일매일 자신의 삶을 살았던 진정함을 통해서도 용기를 주었다. 그의 일을 통해 수만 명의 LGBT 미국인들에게 의료 서비스의 길을 여는 것을 도왔으며, 트렌스젠더들이 절실하게 필요로 하지만 얻지 못하는 일이 너무 잦은 의료 서비스를 보장하는 전국적 움직임을 이끌었다.

앤디만큼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준 사람은 없다. 그는 내게 삶, 인내, 연민, 낙관주의, 신의, 열정에 대해 가르쳐 주었다. 그는 내가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인상적이면서도 가장 겸손했다(그가 나를 견뎌냈다는 것이 놀랍다.). 그의 마지막 몇 주 동안조차 그는 자신의 불운이나 역경보다 자신이 타인들에게 해줄 수 없는 것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그게 앤디였다.

나의 콩, 내 인생에 들어와 줘서 고마워. 정말 많은 의사가 네 상태를 봐선 결혼식 때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어. 하지만 넌 버텼지. 날 위해 버텼는지, 널 위해 버텼는지 나는 모르겠어. 하지만 결국, 넌 내게 사람이 바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줬어. 2012년 8월에 처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줘서 고마워. 1년 전에 나와 결혼해줘서 고마워. 하지만 무엇보다, 네가 너여서 고마워,

사람들이 증오할 시간을 찾아낸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삶은 사랑하기에도 너무 짧은데.

그러나 동족에서 멀어진 우리는

다른 삶을 살며 입증할 수 있다.

그리고 여름의 이른 아침,

나와 당신이 함께 걸으며

우리는 따스한 숨결로 태양을 도와

이슬을 청소할 것이다,

내 사랑, 아침 이슬을 청소할 것이다

- W. H. 데이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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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기사는 허핑턴포스트 US의 'Forever and Ever: Losing My Husband at 24'을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