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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23일 12시 21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23일 14시 12분 KST

"남을 먹이며 시작해 먹이며 끝나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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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조천읍 신촌리에서 콩·보리·무 농사짓는 조병준 씨

29년 전 충남 아산에서 제주 조천으로 '시집온' 조병준 씨는 이제 제주에서 농사지은 콩나물콩을 도로 아산으로 '시집보내고' 있다. 콩은 아산 푸른들영농조합의 가공시설과 만나 콩나물이 되어 전국으로 흩어진다. 들어 보니 그 인연이 참으로 묘한데 정작 말하는 이는 덤덤하다. 돌고 도는 세상 이치, 서로가 영향을 주고받는 도쯤은 일찌감치 터득해 새롭지 않은 모양이다. 그 법칙을 알기에 농사 부산물을 소에게 먹이고, 소똥은 밭에 내는 경축순환농업을 하는가 보다.

글 김세진(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류관희

클래식 흐르는 축사

조병준 씨는 제주 조천읍 신촌리에서 무 3천305㎡(1천 평), 콩나물 콩 1만985㎡(6천 평)을 기르고, 자그마한 밭 991㎡(300평)를 빌려 귤을 재배하고 있다. 콩과 보리를 이모작해 봄부터 가을까지는 콩밭인 곳이 겨울부터 봄까지는 보리밭이 된다. 매일 아침저녁 끼니를 챙겨 줘야 하는 소도 14마리나 된다. 농협에 다니던 남편 김규현 씨가 평일에는 못해도 주말에는 농사일을 함께하고 매일 아침 소 밥을 챙겨 주었는데, 그런 남편이 지난해 3월 유명을 달리해 지난해와 올해는 좀처럼 쉴 틈이 없었다.

"단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어요. 농부들에게 '비오는 날은 공치는 날'이라지만 소를 키우니, 그런 날은 그런 날대로 일이 있어요. 축사 바닥이 질척거리면 보릿짚을 갈아 주고 소를 먹이고 무말랭이 만들고 월동무 등 겨울 채소 작업을 하느라 쉬지를 못했죠."

그나마 지난 9월과 10월 1박 2일로 열린 한살림가공품위원회 회의와 한살림식생활교육센터 강사 연수로 자리를 비운 게 유일하게 쉬었다는 날이다. 그마저도 소 밥 걱정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28살인 아들에게 소 끼니를 챙겨 주라고 당부하면서도 처음엔 마음을 놓지 못했다. 생명을 키우는 책임감이라는 게 이런 건가 싶다.

조병준 씨는 하루를 누군가 먹이면서 시작하고 누군가 먹이면서 마무리한다. 새벽 6시 전에 일어나 세 자녀들이 먹을 아침밥을 차려 놓고는 소 밥을 챙겨 주러 간다. 그리고 나서야 하루 일 시작이다. 자기 점심 끼니를 챙겨 먹을 때 빼고는 종일 밭에서 일하다가 소 끼니 챙기는 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밭에서 일할 때도 콩깍지며 콩대, 브로콜리 잎과 줄기 등 소가 좋아 환장하는 먹을거리를 쟁여 둔다. 이렇게 아침저녁 안부 인사를 나누는 것은 기본, 영양을 생각해서 미리 보리를 물에 담가 싹을 틔워서 먹이고, 소가 심심할까봐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을 들려줄 만큼 정성 지극한 관계이니 그런 소를 도축장으로 보내면서 눈물을 흘렸다는 심정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주인을 믿어 의심치 않는지 올해 명절에 처음으로 내보낸 소는 우리 밖으로 걸어 나가면서도 말썽을 부리지 않았다고 한다. 국산사료를 먹인 그 소는 한살림제주생협 지역 물품으로 공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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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준 씨가 차에서 내려 축사 옆에 있는 밭을 둘러보자 소들이 밥 달라고 난리다. 조병준 씨가 라이그라스를 들고 나타나자, 소들이 목을 빼고 그가 지나가는 쪽을 쳐다본다. 아침저녁 소들 먹이느라 어디에도 맘 놓고 못 가는 신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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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앞에 펼쳐 놓은 돗자리에 싹이 돋아난 곡식이 가득하다. 웬 것인지 묻자 보리를 발아시킨 거라고. 영양분 좋은 것을 먹이려고 보리를 물에 담가 두었다가 말리는 중이다.

마음과 생각이 통해 든든한 공동체

조병준 씨는 어릴적부터 소를 방목하며 키우고 싶다는 꿈을 꿨다. 그래서 지금은 공주대학교 예산캠퍼스가 된 예산농업전문대학에 지원하면서 축산과를 선택했는데, 입학 원서를 대신 접수하러 간 친척 어른이 "여자에게는 축산과보다 원예과"라며 덜컥 원예과로 바꿔 넣었다. 축산과 수업을 도강했지만 원예과 역시 재미있었다. 조병준 씨가 고등학생이 되어 인근 도시로 유학하기 전 충남 아산에서 지낼 때 농사짓는 어머니를 살뜰히 도왔기 때문에 원예과가 낯설진 않았지만 꽃을 키우고 그게 돈과 바로 연결되는 게 싫어 졸업 후엔 아산 응봉농협에서 일했다. 대학 때 대학생불교연합회 활동을 하면서 한 살 어린 남편 김규현 씨를 만났는데 고향이 제주도라니 그와 함께라면 왠지 목장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규현 씨가 군 생활하는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며 연애한 끝에 결혼을 하여 제주로 왔다. 하지만 적응하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당시 제주도는 멀고도 먼 곳이었고 처음엔 사투리를 알아들을 수 없어 서러웠다. 제주도 사람들 정서가 충청도 사람과 너무 달라 낯선데 비행기표 값이 지금처럼 싸지 않아 고향에 자주 갈 수도 없었다. 첫째 아이를 낳기까지 매일 울었다고 했다.

조병준 씨는 아이를 키우면서도 일을 계속했다. 혼자 하기 힘에 부쳐 그만두었지만 시부모님이 물려준 땅에서 마늘농사를 짓기도 했고, 집 앞에서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식품점을 열기도 했다. 무와 배추를 절여서 파는 등의 일이었다. 근처에 마트가 들어서면서 식품점을 접고 어느 회사에 취직해 사무를 보았고, 건강 때문에 쉬며 운동하다가, 2009년 다시 일하게 된 곳이 한울공동체 사무국이다.

"한울공동체는 '큰 나', '온 세상'이라는 뜻이에요. 현재 공동체에 속한 다섯 가구 모두 신촌리에 살아서 만나기도 쉽고 마음이 잘 맞아요. 경조사도 함께하고 힘든 사안이 생기면 집중하는 힘이 있어요. 한살림제주생협에서는 '우렁각시'라는 이름으로 해군기지 반대 평화투쟁을 하는 강정마을 활동가들에게 음식을 해 가는데, 초기에 자리가 잡히기 전에 한울공동체도 자주 음식을 해 갔어요. 농사철학도 비슷해요. 처음부터 경축순환농업을 하겠다는 뜻이 있었기에 다들 소를 키우면서 농사를 짓고 있어요. 단학수련을 하면서 저도 세계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고 깨달았는데 비슷한 생각을 가진 공동체 식구들을 만나 참 좋았어요. 2012년 봄에 다시 전업농부가 될 땐 공동체와 함께 유기농사를 선택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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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이 금세 자랐다. 조병준 씨는 풀을 뽑으면서도 소가 좋아하는 풀과 안 먹는 풀을 구분한다. 사람이 먹을 것들도 따로 챙기기도 한다. 조병준 씨는 밭에서 채취한 가을 냉이로 냉이콩나물국을 끓여 주었다.

도시 조합원과 함께 키우는 '우순이'

들어 보면 한울공동체는 여간내기가 아니다. 농사일도 만만찮은데 다들 소를 키우는 데다, 농사할 때 순환원칙을 지키려 애쓴다. 콩대며 꼬투리뿐 아니라 콩자투리는 찌거나 갈아서 소에게도 먹일 수 있기에 다들 콩농사를 짓고 있다. 또 콩과 이모작하는 보리도 유용한데 소가 먹을 보릿대를 내고 보리 짚은 축사 바닥에 깔 수도 있어서다. "농사짓는 것보다 소 먹을 것을 끌어오는 게 더 힘들다"고 느끼는 건 조병준 씨 혼자가 아닐 텐데도 이 힘든 일을 계속할 수 있는 건 함께하기 때문이다. 한울공동체 강진이 씨는 "무엇보다 공동체 여성생산자들이 사이가 돈독하고, 바쁘고 지겨워도 모여서 회의하고 자꾸 이야기하는 것이 공동체 화목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남성생산자들이 의견이 엇갈릴 때도 있지만 여성생산자들이 사이가 좋으니 알게 모르게 중재 를 한다고.

콩을 콤바인 같은 기계로 수확하면 콩이 깨져 발아율이 떨어진다는 말을 듣고서 공동체 식구들은 따로 탈곡기를 제작해서 그것만 쓰고 있다. 소에게도 수입사료를 안 먹이고 국산사료만 먹인다. 만약 농사 부산물이 충분해 소가 그것만 먹고 연명할 수 있고, 소가 내는 축분만으로 모든 밭에 거름을 줄 수 있다면 완벽한 순환농업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렵다. 현재 한울공동체 밭에 뿌려지는 퇴비에서 축분 비율은 30% 남짓이다. 하지만 순환농업을 실제로 하고 있는 사례를 보여준다는 면에서, 또 한국 농업에 순환농업의 가능성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의미가 깊다.

한살림성남용인생협에서는 2011년부터 2013년까지 국산사료 한우 키우기 운동을 진행해 경축순환농업을 지원했고 조합원들은 1억 3천700여만 원을 모금했다. 그 비용으로 한우 38마리를 입식해 각 농가에서 나눠 키우고 있다. 그렇게 입식한 암소를 '우순이'라 부른다. 우순이를 2~3년 동안 키워 송아지를 한두 마리 낳으면, 출자한 조합원들에게 한우모듬선물세트를 보내기로 약속했다. 조병준 씨도 입식사업을 통해 송아지 세 마리를 지원받았고 올해 조합원들에게 고기를 보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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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개의 꼬투리 안에 콩 다섯 알이 나란히 들어 있으면 속이 꽉 찬 것. 그냥 먹으면 살짝 비릴 수 있다며 말렸지만 콩밭에서 먹어 본 콩은 고소하기만 했다. 이 콩을 기르고 남은 콩대며 콩깍지는 소들이 좋아하는 간식이다. 조병준 씨는 농사짓는 일보다 이 농사 부산물을 긁어모으는 게 더 힘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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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야기 10월 호에서 소개했던 가지밥을 내 오셨다. 제주시 초등학교에 식생활 교육을 하러 가서 가지밥을 같이 해 먹으면, 가지를 안 먹는 아이들도 "고구마맛 같이 달다"며 좋아해 보람 있다고. 제주 아니랄까 봐 옆집 아저씨가 낚시해서 나눠 주었다는 도미가 밥상에 올라왔다. 멸치 빼고 모두 농사지은 것.

땅도 살리고 사람도 살리는 경축순환농업

소들이 먹는 양은 어마어마하다. 농사짓고 남은 부산물로는 턱없이 모자라 사 먹이는 건초 라이그라스는 30kg 한 덩이가 1만 원 정도인데 조병준 씨 소들만 해도 하루 대여섯 덩어리씩 먹어 치운다. 하루 사료값만 6만 원이 이상이 든다. 매일 아침저녁 무거운 건초더미를 옮기는 것도 여자 힘에 조금 벅차다.

"힘들죠. 소 먹이려고 어디 자리도 못 비우고 몸도 힘들고. 힘들지만 유기농사를 짓는다면 소나 닭, 돼지를 기본으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소똥을 준 땅에서 자란 작물은 튼튼하고 병충해에도 강해요. 특히 가뭄같이 날씨가 나쁠 때 견디는 힘이 달라요. 모든 밭에 주기에는 양이 모자라 유기질비료와 함께 주는데 확 차이가 나요. 유기질 비료는 일정한 성분만 있는데 소들은 다양한 것들을 먹기 때문에 미량 성분 등이 더 많아 면역력이 강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10개가 말라 죽을 것인데 5개밖에 안 죽어요. 그러니 똑같은 유기농이라고 해도 우순이 축분을 먹고 자란 작물은 확실히 다르죠."

작물이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는 건 땅이 건강해져서다. 비료를 쓰면 작물이 그것을 빨아 당기고 일부는 땅에 축적되는데 그 때문에 땅속에 흐르는 물이 오염될 수 있고 땅이 딱딱해지는 경반층을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 경축순환농업은 땅도 살리고 지하수도 살리고 그 위에서 사는 사람들과 동물까지 살리는 일이다. 지난해 이렇게 자란 대파와 브로콜리에 '우순이 축분을 먹고 자랐다'고 따로 표시해 공급했다.

힘든 농사를 짓는 이의 자부심일까. 조병준 씨는 농사를 한다면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농사는 아무나 못 지어요. 인내는 기본이고 몸이 힘들어도 해야 하고. 그 시기에 그 일을 안 하면 1년 농사를 망칠 수 있거든요. 하고 싶다고 하고 하기 싫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농사를 지어 본 사람이라면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다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

그럼에도 생활은 녹록지 않다. 며칠 전 한살림제주생산자 교육에 온 건국대 경제학과 윤병선 교수는 "농가 소득에서 농업소득이 차지하는 비율이 30% 이하로 떨어진 지 오래고 6만 6천115㎡(2만 평)은 지어야 농업소득으로 가계비를 충당할 수 있다"고 했다. 더구나 유기농은 친환경제제나 유기질 비료값도 만만치 않다. 또 유기농은 잡초와의 싸움인데 조병선 씨처럼 홀로 농사를 짓는 사람은 가끔 사람을 불러 풀을 뽑는데 그 인건비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그는 지난해 12월부터 올 초까지 농사를 지으면서 요양보호사 일도 겸했다. 농협에 다니며 살림을 같이 꾸리던 남편이 운동하다가 잘못돼 하루아침에 운명을 달리했고 그런 갑작스러운 이별이 힘들어 1년을 매일 울면서 보냈지만 조병준 씨는 "일이 많고 바빠서 이겨낼 수 있던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일 년에 며칠 정도는 맘 편히 쉬시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제주공항으로 돌아오는 길에 '놀멍 쉬멍 갑서'라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우리를 먹여 살리는 고마운 농부들도 '쉬멍' 갈 수 있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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콩밭에서 한창 일하다가 눈을 들어 보면 멀리 바다가 보인다. 햇살을 받아 노랗게 빛나며 익어가는 콩꼬투리와 푸른빛이 바다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조병준 씨는 이 풍광 덕에 콩밭에서 일하는 걸 좋아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