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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0월 16일 06시 29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0월 16일 14시 12분 KST

나는 농부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나중에 너 그러다가 농사짓는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할 일 없으면 농사지으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사실 농사일은 전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요. 남들은 촌놈이다, 부족해서 농사짓는다 어쩐다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에요. 내가 농사짓는 게 자랑스러워요. 농사가 기본이에요. 스마트폰 없이 살아도 밥 없이 못 살죠. 식량자급률이 점점 낮아지는데 내가 농토를 지키고 있잖아요. 그리고 농사짓는 걸로 인해 홍수도 예방하고 산소공급도 하고 자연환경도 지키고. 어디 가면 '충남 당진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소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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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당진에서 벼·생강·감자·양파 농사짓는 김남숙·정광영 씨

봉숭아, 분꽃, 채송화, 익모초, 함박꽃, 옥잠화, 모란, 난초....

집을 빙 둘러 핀 꽃들이 걸음을 멈추게 했다.

충남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에 있는 김남숙·정광영 씨 집 마당에는 꽃들이 화사하게 피어 있었다.

50년 동안 농사지으면서 벼와 잡곡을 기른 논과 생강, 양파, 배추, 무 등을 키우는 밭도 얼마나 조화롭게 가꾸었을지 눈에 선했다.

글 김세진(살림이야기 편집부) \ 사진 류관희

"다 지들이 자란 거여."

마당에 핀 꽃들을 보고 감탄하자 김남숙 씨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뿌리고 가꾼 게 없으면 저렇게 단정하게 자랄 리 없는데도 한사코 모른 척이다. 살아 온 세월에 대해서도 공치사가 없다.

"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그렇게 45년을 그것만 하면서 보냈는데 뭘 취재할 게 있어요?"

남편 정광영 씨는 가톨릭농민회·한살림을 하며 농민의 권리와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느라 자주 집을 비웠고 그때마다 김남숙 씨 홀로 집안 살림뿐 아니라 농사도 도맡아 했으면서 그에 대해서는 언급도 하지 않는다. "농사도 하셨잖아요?" 했더니 "농사는 기본"이라 말하지 않았단다. 다만 "여자들은 바빠 죽겠다."고 한다. 논이고 밭이고 일을 하고 돌아오면 집안일이 또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안에서도 밖에서도 일이 늘 있다고.

그렇지만 못하겠다고 엄살 부린 적은 없다.

"저이는 일손이 바쁠 때도 일이 터지면 '삑'하면 나갔쥬. 그리고 고집이 대꼬챙이야. 근데 안 그러면 이 농사 못해. 저렇게 세상을 바꾸려 하고 고집이 있으니 여태까지 친환경 농사 지을 수 있었던 거쥬."

김남숙 씨에게 생산자공동체의 여성 대표나 다른 바깥 활동을 한 적은 없느냐 물었더니 "그럴 여력이 어디 있냐?"고 되묻는다. 한 사람이 바깥 활동을 하면 다른 사람이 덤덤히 그 빈자리를 매꾸면서 채워야 농사를 계속할 수 있는 법이다. 그렇게 그 자리를 지켜 온 김남숙 씨지만 한곳에서 나고 자라 벗어나지 않은 게 문득 답답하기도 하고 다른 일도 경험해 보고 싶었다. 지난해 농사를 짓는 틈틈이 요양보호사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땄다. 체력만 허락한다면 보람도 있고 재미도 있는 일이라, 그 일을 해 보고도 싶지만 아직은 농사일 때문에 여력이 없다. 정광영 씨는 늘 제자리를 지켜 주고 같이해 준 아내가 고맙다. 그 덕에 모든 일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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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좀 보셔요. 빨간 고추가 이렇게 탐스럽게 덩어리로 있잖아. 이래서 농사지어유." 뙤약볕 아래에서, 빨간 고추밭에 들어간 김남숙 씨는 영근 고추를 보더니 금세 표정이 밝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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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료와 농약을 주면 채소가 무르고 지려. 아삭거리는 맛이 없고 아무래도 덜 영그는 것 같아. 밥도 그래유. 난 몰랐는데 언젠가 식당에서 다른 밥을 먹어 보니까 우리 밥맛 좋은 걸 알겠더라고. 이 밥상에서 우리가 농사짓지 않은 건 이 멸치뿐이에유. 이 멸치가 얼마나 귀한 건지는, 얼마 전에 한살림 소식지에서 멸치잡이 이야기한 거 보고 비로소 알았어요. 멸치잡이가 어려운 걸 알게 되어서 지금은 얼마나 아껴서 소중하게 먹는지 몰라요. 드셔 보셔유."

신앙을 지키는 마음으로 시작한 친환경 농사

정광영 씨는 이곳 매산리에서 나고 자랐다. 군대에서 제대한 후에 외지 인천에 가서 일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고향에 남아 농사를 짓게 되었다. 천주교가 들어온 지 200년이 넘는 매산리 지역에 살면서 정광영 씨 조상도 일찌감치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19세기 초 천주교 박해가 일어날 때, 당시 서울과 수원의 신도들이 배를 타고 삽교천으로 들어와 한정리와 매산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정광영 씨와 역시 할아버지 때부터 천주교를 믿었던 김남숙 씨는 소개를 받고 각각 27살, 26살 되던 1970년에 결혼해 가정을 이뤘다. 밥 먹을 때 기도는 기본이고, 지난해 겨울부터 이 부부는 성서를 필사하기 시작했다. 매일 읽지만 손으로 적어 내려갈 때는 뜻이 더 깊게 와 닿는다고.

친환경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계속해 온 데도 신앙이 힘이 컸다. 1970년대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에서는 종자 때부터 농약을 풀어 물에 담그라는 영농교육을 하곤 했고 정광영 씨도 열심히 그에 따랐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농약중독으로 죽는 사람이 생겼고 정광영 씨 자신도 낮에 담배 밭에 농약을 주고 밤에 친구를 만났는데 술자리에서 토하고 어지러웠던 경험이 있다. 그러던 중 신앙교육을 받으러 간 대전에서 농약 때문에 도시에 암환자가 많이 발생한다는 신부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강연을 듣고 나서 그날로 바로 일 년에 아홉 번 치던 농약을 세 번으로 줄였어요. 농약에는 맹독성, 고독성, 저독성이 있는데 당시 농민들은 벌레 잘 죽으라고 맹독성 약품을 뿌리고는 했지요.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첫째 농민 스스로를 위해서, 둘째 도시 소비자를 위해서 농약을 줄이자고 말했어요."

1974년 가톨릭농민회에 가입해서 활동하던 정광영 씨는 농약을 줄여 농사를 짓기 시작했고, 농협 조합장 직선제 운동 등 농민의 권리를 위해서도 활동했다. 그러다 만난 한살림연합 이상국 전 대표가 "정 형제, 우리 농약 안 주고 한번 해봅시다."라며 한살림운동을 함께하자고 권유했고 1987년 정광영 씨는 한살림에 생산자로 참여했다.

친환경 농사를 시작하면서 마을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도 들었다.

"농약을 왜 안 뿌리냐고, 그 벌레들이 살아서 우리 논에 오면 우리도 피해를 보는데 왜 농약 안 주고 버티느냐고, 그 친환경 농사지으면 떼돈 버느냐고, 그렇게들 잔소리를 했어요. 짠 하고 잘되는 걸 보여줘야 하는데 몇 해 동안 벼가 많이 죽고 딱 보기에도 수확량이 적으니까 할 말이 없더라고요."

그럼에도 김남숙 씨, 정광영 씨가 친환경 농사를 계속한 데는 신앙의 힘이 컸고 또 자신들을 믿어 준 사람들을 저버릴 수가 없어서였다.

"마을에서 함께 한살림을 시작했던 사람이 7명이었는데 모두 포기했어요. 농약을 안 뿌리니까 3년 동안 수확량이 줄더라고요.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풀이 나고 병충해 피해도 입었어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한번 약속한 거니 그만둘 수가 없었어요."

지금은 매산리공동체에서 10가정이 함께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다. 이전에 오랫동안 공동체 대표를 하면서 "사람들이 함께하기 위해서 리더는 부모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함께할 수 있도록 작목을 배치하고, 말을 많이 하는 대신 몸과 행동으로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제 이순이 넘어 농사를 많이 줄이려는 그들에게 공동체 생산자들이 "그래도 계속 함께해 주셔야 우리도 힘이 난다."고 말해 주니, 세월을 그냥저냥 보낸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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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십 년 동안 마주 보고 살았는데 또 뭘 봐. 어느새 45년이유." 마주 보고 사진 찍자 했더니 김남숙 씨가 딴청이다. 웃으시라고 했더니 "뭐, 재미있는 일이 있어야지 웃지." 하는데 그 말투가 장난스럽고 얼굴은 함박웃음이니 쑥스러운가 보다. 정광영 씨는 "안사람 앞에서 죽고 싶"단다. 혼자 남아서 살 자신이 없다며, 조물주가 남자를 먼저 데려가는 게 이유가 있는 것 같다고. "일흔이 넘어 지난 삶을 되돌아보는데 같이 열심히 잘 살아 주어 고맙고 칭찬하고 싶지."라고 말하면서 칭찬의 주인공은 쳐다보지 않는다. 은근한 표현도 똑 닮았다.

농사는 하느님과의 동업

"길어야 80살까지밖에 더 짓겠어? 더 이상은 불가능한 일이여. 감자 상자 중량도 20kg씩이고 밭에 내는 퇴비도 20kg인데 이제 힘든 일은 어려워. 이제 10년도 안 남았잖아. 누구라도 와서 농사를 이어받아야 할 거 아니야?"

김남숙 씨, 정광영 씨의 고민은 농사지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과 그걸 이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매산리공동체 전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공동체에서 최연소인 생산자가 예순을 넘었다. 김남숙 씨 자녀들은 제각기 도시로 나가 살고 있다. 어느 날 한 젊은 부부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와서 농사를 짓고 싶다고 말했지만 정광영 씨는 "가난하게 살 각오를 하지 않으면 어렵다. 실패하지 않고서는 농사 못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내지 않을 생각 정도는 해야 한다."며 돌려보냈다.

1978년부터 꾸준히 영농일지를 써 온 정광영 씨는 작물의 상태나 그날그날 한 일뿐 아니라 종자대나 농기계값, 감가상각비 등도 기록해 놓았는데 그걸 토대로 계산해 보면, 정광영 씨가 하는 논 1만 1천570㎡(3천500평) 밭 3천305㎡(1천 평) 규모의 농사로는 두 사람이 겨우 먹고살 정도이기 때문이다. 우선, 농사는 땅이 필요한데 땅을 빌려서 쓴다고 해도 임차비나 농기계비 등이 많이 든다. 80~90마력의 쓸 만한 트랙터 값이 5~6천만 원은 하고, 큰 콤바인 가격도 7천만 원 정도는 한다. 이앙기 값도 1천700만 원은 드니 당장 몇 억이 필요하다. 그래서 전원생활에 대한 낭만만 가지고 농사를 계속 지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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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이 소나무를 600만 원 주고 팔라는 거야. 이웃들은 600만 원을 불렀으면 800만 원에 팔지, 왜 안 팔았냐고 해요. 이게 100년 된 조선솔, 재래종인데 우리 아버지가 이 동산을 밭으로 매면서 이 나무를 남겨 놓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여기 앞에 선산도 있고 그런데. 돈으로 바꿀 게 있고 못 바꾸는 게 있지, 그런 걸 잘 구별하고 살아야 해요." 조상을 모신 선산 앞엔 성모마리아상도 놓였다. 나이든 소나무 앞에 앉아 쉬는 부부의 뺨에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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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초부터 7월 초까지 영농일지에는 '김매기'라고 연달아 적혀 있다. 올해 유난히 풀이 많아 매일매일 김매기를 하고 또 했다.

"공부하지 않는 학생들에게 '나중에 너 그러다가 농사짓는다.'라고 이야기하면서 할 일 없으면 농사지으라는 식으로 말하는데 사실 농사일은 전혀 쉽지 않아요. 게다가 마음대로 되지도 않고요."

매년 기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그때그때 빠르게 판단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오랫동안의 경험과 이론과 실력이 쌓여야 가능한 일이다. 또 그런 경험이 축적되어도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있다. 올해만 봐도 지난해와 달리 가뭄이 심하게 들어 양파 수확량이 1/3로 줄었고 감자 수확량도 20kg짜리 34상자 내던 것이 24상자로 줄었다.

"농사는 하느님과 완전 동업이여. 지하수로 아무리 물을 뿌려 줘도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와는 달라. 공기 중에 질소와 인산 등이 비에 섞여서 내려오는데 지하수는 적시기만 하니까. 그런데 정말 기후가 정말 많이 변했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기온이 올라 봐야 31~32℃였는데 이제는 35~36℃까지 올라가. 여기가 해변이 가까운데도 그래."

정광영 씨는 환경이 파괴되어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마구 쓰기 때문에 후손들이 피해를 입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정광영 씨와 김남숙 씨는 시골에 그 흔한 트럭도 한 대 없이 생활한다. 논밭은 바로 뒷동산에 있고 가까운 거리는 경운기나 자전거를 타고 간다. 멀리 갈 때는 대중교통을 이용한다. 차가 있으면 금세 다녀올 거리도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가려니 차시간대를 기다리느라 한참 걸리기도 한다. 그래도 "뭐 나까지 차를 몰면서 환경오염을 할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을 가진 건 부부 둘 다 마찬가지다.

"올해는 유난히 풀이 더 많이 나서 6월 초부터 7월 초까지 날마다 김매기를 했어요. 논에 우렁이를 넣지만 우렁이가 안 먹는 풀 종류도 있고 이미 억세진 풀도 있어서 그런 건 사람이 매 줘야 하거든요."

그날 또 예취기를 맨 정광영 씨는 약간 절뚝거리면서도 그런 것쯤은 전혀 불편하지 않은 듯 능숙하게 제초를 했다. 오른쪽 무릎 연골이 닳아 병원에서 진작 수술하라는 것을, 수술하면 쪼그리고 앉지 못해 농사를 짓기 힘들다며 한사코거부했다. 그나마 논은 질퍽하니 발이 빠져서 무릎과 허리가 덜 아파 김매기가 더 쉬웠다고 했다. 2013년 뇌경색을 앓아 힘든 시간을 보냈지만 정광영 씨는 "몸이 아픈 뜻이 있겠지."라고 받아들인다. 김남숙 씨 역시 힘들었던 시간을 돌아보면서 "내가 타고난 팔자가 그런 것이여. 하느님이 너는 이 세상에서 이렇게 살라고 한 거야."라고 받아들이는 모습이 참 닮았다.

예취기를 매고 논을 거니는 남편을 바라보며 김남숙 씨는 벼꽃이 얼마나 예쁜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침에 해 뜰 무렵에 벼가 꽃을 피워요. 벼에는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는데 바람 불면 수정되지요. 자가 수정되어요. 그리곤 10시부터 3시 사이에 오므라지죠. 벌어졌다 오므라지는데 그게 얼마나 신기하고 예쁜지 이건 농사짓지 않으면 볼 수가 없어요. 이래서 농사짓나 싶죠."

정광영 씨도 농부보다 좋은 직업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들은 촌놈이다, 부족해서 농사짓는다 어쩐다 생각할 수 있지만 아니에요. 내가 농사짓는 게 자랑스러워요. 농사가 기본이에요. 스마트폰 없이 살아도 밥 없이 못 살죠. 식량자급률이 점점 낮아지는데 내가 농토를 지키고 있잖아요. 그리고 농사짓는 걸로 인해 홍수도 예방하고 산소공급도 하고 자연환경도 지키고. 어디 가면 '충남 당진에서 농사짓고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소개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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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르렀다가 누렇게 되었다가. 계절에 따라 얼마나 경이롭게 바뀌는지 농사 안 짓는 사람들은 몰라." 예취기를 가지고 논에 들어간 남편을 바라보며 김남숙 씨가 말했다. 햇볕과 바람과 농부의 땀을 온 나락으로 받은 지금 8월의 논은 눈부신 푸른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