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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7월 07일 07시 1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7월 07일 14시 12분 KST

냉장고 잘 부탁해

글 \ 사진 이선미(《살림이야기》 편집부)

텔레비전 없는 집은 간혹 봤지만 냉장고 없는 집은 본 적이 없다. 24시간 한시도 꺼지지 않는 필수 살림살이인 냉장고는 잘 쓰면 '우리 집 밥상 지킴이'요, 잘 못 쓰면 '식재료들의 무덤'이다.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냉장고를 알고 나면 더 야무지게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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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인 가족이라면 450ℓ가 적당

요즘 <냉장고를 부탁해>라는 TV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유명인의 냉장고를 그대로 가지고 와서 그 안에 있는 식재료만으로 요리한 후 평가하는 프로그램이다. 요리사들이 짧은 시간 동안 기가 막힌 요리를 해내는 것도 볼만하지만, 사실 나는 냉장고 그 자체를 구경하는 데 더 정신이 팔린다. 전 세계의 온갖 식재료가 가득 찬 냉장고도 있고, 먹을 만한 건 별로 없이 채소들도 상해 버린 냉장고도 있다. 직접 만든 반찬들이 많은 것도 있고, 즉석식품이 빼곡한 것도 있다. 여기서 냉장고는 단순히 식재료를 보관하는 물건이 아니라 사용하는 사람의 취향과 생활방식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상징이다. 나는 냉장고를 엿보며 다른 사람과 일상을 공유하는 듯한 기분을 느낀다.

2013년 '가전기기 보급률 및 가정용 전력소비행태조사' 결과를 보면 냉장고의 연간사용시간은 8천760시간으로 가장 길다. 의외로 덩치에 비해 소비전력은 높지 않은데, 그래서일까? 집집마다 냉장고 한 대는 당연하고, 김치냉장고는 선택 사항이 됐다.

서울 동작구에서 남편과 대학생, 고등학생인 두 딸과 함께 사는 석보경 씨는 651ℓ짜리 냉장고와 160ℓ짜리 김치냉장고를 각각 한 대씩 쓴다. 지금 쓰는 건 10년 전 이사하면서 큰맘 먹고 바꾼 것이다. "지금 게 고장 난다면 이만한 냉장고를 또 사지는 않을 것 같아요. 10년 전에는 양문형 냉장고가 유행이기도 해서 참 갖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나중엔 작은 냉장고로도 충분할 듯해요."

일반적인 냉장고 용량 기준은 '70ℓ×가족 수+상비품 용량(100ℓ)+여비품 용량(70ℓ)'이라고 한다. 4인 가족이라면 (70ℓ×4)+100ℓ+70ℓ=450ℓ, 2인 가족은 310ℓ이다. 신기한 것은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1인 가구가 늘어나는 등 가구 구성원은 줄어드는데 냉장고는 점점 커진다는 점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 음식을 먹느냐는 것은 냉장고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 그리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냉장고의 크기는 이미 정해져 있어 가족 수나 집의 넓이 등에 따라서는 바뀌지 않는 걸까? 생활에 냉장고를 맞추기보다 냉장고에 생활을 맞추는 느낌이다. 하지만 부엌이 그리 넓지 않으면 커다란 냉장고 때문에 집이 답답해 보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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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 만큼만 사서 먹고 치우는 게 냉장고 잘 쓰는 요령

석보경 씨는 예전에는 뭐든 검은 비닐봉투에 싸서 정리하지 않고 냉동고에 넣는 등으로 냉장고가 가득 차 있었단다. "그런데 뭐든 냉장고에 넣으면 맛이 없어지는 게 느껴졌어요. 또 음식이 안 보이면 안 먹게 되는 걸 깨달았죠." 그 이후로 냉장고의 내용물을 조금 덜어 내고 내용물이 잘 보이게끔 정리하고 있다. 음식을 냉장고에 넣고 사흘이 지난 시점에서부터 비타민C와 베타카로틴 등의 좋은 영양소가 급격하게 줄어든다고 한다. 게다가 냉장고가 꽉 차 있으면 식재료가 남아 있는데도 알지 못하고 또 사다 넣느라 돈을 낭비하게 되고, 그만큼 전기요금도 많이 든다. 냉장고를 청소할 때마다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 등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오니, 딱 먹을 만큼만 사서 먹고 치우는 것이 냉장고를 잘 쓰는 요령이다.

그는 김치냉장고에 김치 외에 과일이나 쌀 등도 보관한다. "예전에는 냉장고가 작게 느껴졌는데, 지금은 적당해요." 도시에 살면서 먹을거리를 주로 사 먹기 때문에 저장할 식재료도, 저장할 이유도 딱히 없다. 그러나 농촌에서 농사지은 걸 저장하거나 받아 먹는 사람은 냉동고 기능이 좀 더 필요할 것 같다. 그런 면에서 양문형 냉장고는 너비가 좁아 활용도가 낮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1980년대 후반 냉장고가 널리 보급되면서 채소와 과일을 저장해 두고 먹을 수 있게 됐다. 또 냉장고는 한국인의 밥상에서 염도를 낮추는 데도 크게 이바지했다. 더운 여름철 음식이 상하지 않게 일부러 짜게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살림하는 사람들에게는 시간적 여유와 편리함을 제공했다. 매일 장 볼 필요 없이 일주일에 한두 번만 장을 봐도 문제없고, 식재료를 지금 당장 요리하지 않아도 상할 걱정 없다.

맞벌이를 하는 석보경 씨는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장을 본다. 가족 각자 필요한 식재료를 조금씩 사 오기도 하지만 냉장고의 전체적인 살림은 그 담당이다. 아침은 먹지 않고 점심은 밖에서 먹기 때문에 주중에는 저녁만 집에서 먹는다. "주말 동안 하루 두 끼만 집에서 해 먹어도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아요." 냉장고 속에 식재료가 가득한데도 먹을 게 없는 것 같은 생각에 결국 외식하러 나간 경험이 다들 한 번쯤 있지 않을까? 그 음식이 정말 먹고 싶어서라기보다는 냉장고를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까닭이다.

냉장고를 보면 "마치 사람에게 겉모습과 다른 참모습이 숨어 있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식습관과 실제 식습관이 매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우리 집 냉장고를 열어 봤다. 평소 나는 조리과정을 최대한 줄이고 식재료 본연의 맛 그대로를 느끼는 것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소스와 각종 양념이 237ℓ 냉장고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음식물 버리는 걸 정말 싫어하는데도 맨 아래 칸에서 부추와 상추가 시들고 있다. 고마운 냉장고를 이렇게 아무렇게나 쓸 수는 없는 일. 내일은 냉장고 청소 후 '집밥' 먹는 거다.

* 참고

《욕망하는 냉장고》, 애플북스 펴냄, 2012년

《시간·돈·식재료 낭비를 단숨에 해결하는 냉장고 정리술》, 중앙북스, 2013년

* 이 글은 한살림이 만드는 생활문화 월간지 <살림이야기>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