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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1월 20일 05시 57분 KST | 업데이트됨 2018년 01월 21일 14시 12분 KST

앵콜, 노인의 노래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케이블 채널을 돌리다 마법 같은 목소리를 듣고 말았다. 노래방 기기 앞에 선 할머니 한 분. 상념에 젖은 표정으로 반주에 맞춰 천천히 노래를 불렀다. 젊은 날 사랑 이야기였던가, 아련한 가사가 모니터 위로 흘렀고 그 가사보다 더 슬픈 음색이 내 방을 가득 메웠다. 삶의 무게가 느껴지는 질박한 목소리는 짙고 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마이크를 쥔 주름진 손, 애절한 눈동자는 청춘보다 강력했다. 화면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노래방 기기와 순서에 따라 등장하는 노인들이 전부였다. 노인 복지 행사를 기록한 영상 같기도 했고 작은 케이블 방송사의 편성 시간을 채우기 위해 급조된 프로그램인 것 같기도 했다. 감상 없는 멜로디를 연주하는 기계와 축적된 감정을 관망하듯 읊조리는 노인들의 노래는 근사한 아이러니였고 컬트 영화에서나 느껴질 법한 감각으로 나를 자극했다.

노인 노래방 방송. 어르신 노래자랑. 노인정 노래방. 노래방 티브이. 그로부터 며칠 뒤 그 방송을 다시 보고 싶어서 단어를 바꿔가며 부지런히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노래방 형식의 프로그램이 더러 눈에 띄었지만 내가 매혹된 할머니가 등장하는 방송은 아니었다.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그날의 감상은 증폭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유일한 팬이었지만 동시에 비운의 팬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녀의 노래를 다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제대로 된 영상을 올리지 않은 사람들이 야속했으나 한편으로는 나의 취향이 의문스럽기도 했다. 나는 왜 유독 노인의 노래를 좋아하는 걸까. 조니 캐시가 노년에 부른 노래를 들었을 때도 나는 똑같이 동요하지 않았던가. 젊은 마리안느 페이스풀의 청아함보다 그녀의 걸진 중년, 노년의 멜로디를 애호하지 않는가.

피폐한 과거의 회한 혹은 흔들렸던 청춘의 기록. 나는 그들이 과거에 머물러 있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피로한 육체로 '지금'이 묻어나는 존재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이다. 때로 노인의 목소리가 젊은이의 것보다 절실하게 생의 모든 면을 느끼게 해주는 것 같다. 앳된 가수들의 노래는 나를 설레게 만들지만 노인의 곡조는 삶의 어두운 모서리, 잊힌 충동을 불러내는 힘을 갖고 있다. 젊음에 정박하지 않고 늙음에 스러지지도 않는, 상처와 훈장이 뒤섞인 목소리는 정말 멋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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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는 오래 살아서 눈이 나빠졌어." 네 살 된 손녀를 안고 흐흐 웃는 아빠를 보면서도 나는 같은 생각을 한다. 올해 환갑이 된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미성인 반면 (미스터리 아닌가) 아빠의 목소리는, 미안하지만, 확실히 늙었다. 그러나 '잊히리라' 작정한 노가수 정태춘, 내가 제일 잘 아는 노인의 가창은 지금 가장 훌륭하다. 초기작들의 서정을 극대화하는 거친 음색을 듣다 보면, 마치 노래들이 '자네가 늙기를 기다렸네.' 미소 짓는 듯하다. 나는 내 취향을 근거로 새로운 앨범을 내야 한다고 아빠를 설득하는 중이다.

"노인이라 안 한다고? 앨범 내야지! 기록으로서도 의미가 있잖아." 버릇없는 아이처럼 조른다. 우디 앨런은 여든이 넘었는데 아직 왕성한 활동을 하더라, 해리슨 포드도 노인의 모습으로 스타워즈에 다시 등장하지 않았냐. 다소 황당한 비교를 하며 흥분하기도 한다. 솔직한 마음은 쑥스러워 표현하지 못한다. '지친 목소리라도 계속 듣고 싶으니 노년의 노래 들려주세요. 사라지지 않게 꼭 남겨주세요.' 나는 괜히 삐진 것처럼 입만 삐죽거린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