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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3일 06시 00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4일 14시 12분 KST

립스틱 검게 바르고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날 위해 하얀 여자가 되어줄 수 없어?" 내게 황당한 부탁을 했던 남자가 있었다. 가무잡잡 태닝 한 피부에 밝게 염색한 머리, 짙고 얼룩진 눈 화장을 한 내게 하얀 여자가 되어달라니 순간 엄청난 저항감이 느껴졌다. 그가 말하는 '하얀'이란 태닝하지 않은 피부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하얗고 투명하게 변하길 바랐던 것은 내 성향 그 자체였다. 나의 타투, 화장, 옷차림에서 드러나는 '기 센 여자'의 기호들이 몹시 불편했던 것이다. 어쩌다 무서워 보이는 여자를 좋아하게 되었으나 그런 나를 받아들이기 힘드니 자신을 위해 내 가치관과 스타일을 탈색해 달라는 것이었다. 교정한다면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여자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소였달까. 살갗을 태우지 않아도 본래 누렇게 태어난 나는(23호, 웜톤) "그럼 당신은 태산 같은 근육 덩어리가 되어 까맣게 윤기가 흐르는 피부를 가지도록 노력할래?" 쏘아붙였다. 덧붙여 "당신 몸에 타투가 하나도 없으니 너무, 너무 시시해." 농담도 통하지 않던 관계는 즉시 끝이 났다. 결국 그는 '홍대나 배회하는 양아치'라는 훌륭한 낙인을 내게 선사했고 나는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때 개설한 블로그 이름이 '불량한 마이너리그' 불온한 여자의 작은 간판은 꽤 호기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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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10년이 흘렀다. 내년엔 럭키 서른 세븐, 37세를 목전에 둔 나는 여전히 같은 취향을 갖고 있다. 애인이 심쿵한다는 청순한 원피스, 부드러운 인상을 연출한다는 색조 화장품은 내 구매욕을 자극하지 못한다. 차라리 민낯에 뿔테 안경, 기능만 강조된 옷을 입고 아무것도 선언하는 바 없이 털털하게 돌아다니는 것이 낫다. 하지만 중요한 약속이 있는 자리엔 꼭 진한 화장을 하고 나간다. 마치 의식을 치르는 것처럼 진지하게 거울을 노려본다. 사람들은 민낯이 어떤 이의 본연의 모습인 듯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내게 스타일링이란 우연으로 갖게 된 육체에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며 나 자신을 더욱 명료하게 만드는 행위다. 화장도 마찬가지다. 자연스러운 모습을 은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내가 원하는 나를 재현하고 잠들어 있던 인격의 다른 부분을 소환하는 과정이다. 타고난 육체를 초월하려는 허영? 분장으로 획득한 페르소나의 망상? 어찌 가꾸어도 자본주의의 딸? 그런 비난도 내겐 달콤하게 들린다. 매체가 권유하는 아름다움을 맴돌다 빗겨나기를 거듭하며 나만의 이미지를 찾으려는 시도를 하는 것이, 나는 재밌다. 신새벽의 탕아처럼 화려하고 피로한 얼굴을 그리고 타투를 드러낸 채 거들먹거릴 때, 나는 가장 나 자신에 가깝다. '있는 그대로의 나'란 그런 것이다. 타인의 취향에 거슬리지 않는 복식은 나의 안전함을 보장해주지만 어쩐지 굴욕적이다. '살살, 조용히 살아가고 있어요'라는 문구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인파에 섞인 기분이다.

그렇게 이기적인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바로 내 욕망을 충족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 몸에 끼얹은 기호들을 잘 읽어내는 사람과 연애하고 싶다. 우리는 가공된 껍데기의 천진한 천박함, 뒤틀린 인정 욕구를 전시하며 다정히 손을 잡을 것이다. 따가운 시선은 사랑의 장작, "당신만 당신을 할 수 있어." 서로를 위한 간지러운 찬사를 보낼 수 있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속절없는 인생의 코스프레, 오늘의 립스틱은 검정. 내가 립스틱에 붙인 이름은 '어쨌든 마이 웨이'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