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2014년 05월 26일 13시 58분 KST | 업데이트됨 2014년 07월 26일 14시 12분 KST

큰 줄기로서의 인생은 이미 소멸된 작은 인생들로 만들어져

'물건 속에 이야기가 담긴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물 속에서 가치와 상징과 관념을 찾아내거나 구매하고-소유하고-버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물건을 통제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사물이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서로의 시간과 말과 표정이 한꺼번에 흐릿해질 때 물건만은 또렷하게 남아 사건과 사연을 지닌 채 버티고 서 있다. 그래서 이별한 후 관계된 물건을 모아 박스에 담아 버리는 누군가의 표정이 그토록 끊어내듯 결연했다.

큰 줄기로서의 인생은 이미 소멸된 작은 인생들로 만들어져

오래된 책 혹은 괴상한 책(3)

-《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 린 섀프턴, 민음사, 2013

-《Swimming Studies》, 린 섀프턴, blue rider press, 2012

*<오래된 책 혹은 괴상한 책> 연재는 오래된 나머지 이제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책과 이상한 나머지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책의 발간을 부추기는 작업이다. 하지만 모든 부추김이 그렇듯 적잖은 과장과 허풍이 포함되어 있다.

불편한 표지였다. 린 섀프턴의 소설 《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민음사, 2013)을 처음 보았을 때, 그 불편함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온통 붉은 바탕 때문인가. 마치 그것이 더 값비싼 방식이라는 듯 눈 대신 보석을 달고 있는 푸들 조각상 때문인가. 소설책치고는 꽤 큰 판형 때문인가. 모를 때는 낱장의 표지라도 공부하듯 집중하는 수밖에 없으니, 다시 바라보다 알았다. 이 위화감은 '틀린 그림 찾기'처럼 꼭 있어야 할 곳에 두 가지 이름이 삭제되었기 때문에 생겼다. 작가의 이름과 출판사의 이름.

경매 카탈로그의 형식을 빌려 한 연인의 연애사를 다룬 소설 《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은 표지의 형식 역시 경매 카탈로그를 그대로 따랐다. 수록된 물건 혹은 작품을 판매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책, 경매 카탈로그의 표지에 만든 자의 이름과 쓴 자의 이름이 필요할 리 없다.

길고 긴 원제는 《레노어 둘런과 해럴드 모리스의 소장품들 가운데서 고른 중요 물품과 개인 자산. 책, 길거리 패션, 장신구 포함 - 스트라찬 & 퀸 경매, 2009년 2월 14일》로, 팔기 위해/잊기 위해 경매에 내어놓은 물품들만으로 쌓아올린 연인의 가상 연대기다. 서로 선물한 책과 엽서, 함께 찍은 사진, 그릇과 잼, 여행용품과 옷가지, 시계와 양념통까지 332개의 일련번호로 정렬되어 있다. 세기의 커플이 아닌 이상 그들이 주고받거나 공유한 물건이 고급 경매에 오를 수 없잖은가. 작가 린 섀프턴은 경매 카탈로그의 고전적인 형식을 영리하게 빌려 우직하게 "한 연인의 사소한 사물들이 벼룩시장이 아닌 경매의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다"고 밀어붙인다.

'물건 속에 이야기가 담긴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사물 속에서 가치와 상징과 관념을 찾아내거나 구매하고-소유하고-버리는 과정을 통해 우리 스스로 물건을 통제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사물이 그들의 이야기를 모두 빨아들이고 있었다. 서로의 시간과 말과 표정이 한꺼번에 흐릿해질 때 물건만은 또렷하게 남아 사건과 사연을 지닌 채 버티고 서 있다. 그래서 이별한 후 관계된 물건을 모아 박스에 담아 버리는 누군가의 표정이 그토록 끊어내듯 결연했다.

결국 이 컬렉션일 수 없는 컬렉션을 통해 드러나는 물품들은 둘런과 모리스라는 연인의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단서가 된다. 독자는 그저 명탐정 같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이어지는 사진과 목록을 보면서 "1248번 메모를 구매해서 그들의 다툼을 소장하겠어"라고 말하면 그만이다. 어떤 엽서는 이들 외에도 수천 명의 사랑을 도왔을 테고 어떤 음반은 오직 이들의 역사에만 자리하고 있을 테다. 후에 읽을 독자의 즐거움으로 남기기 위해 비밀에 부치는 마지막 1331, 1332번 물품은 그만큼 예상하기 쉽지만, 예상과 무관하게 압도적이다. 아름다운 문장으로 끝맺음하려는 욕망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두 장의 사진이 처연한 관계의 끝을 선명히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연애담을 보편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풀어낸 《둘런과 모리스의 컬렉션》과 달리 2012년작 《Swimming Studies》(blue rider press, 2012)에서 그는 자신의 유년을 이야기한다. 십대 시절 올림픽 수영 캐나다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위해 훈련을 거듭하다, 한계를 깨닫고 수영을 그만둔 때. 엄연한 실패의 개인사다. 예선에 출전할 정도의 재능은 인정받았으나 국가대표가 될 정도는 아니라는 참혹한 선고를 온몸으로 듣는다. 우리는 순위에 밀려 엄청난 재능으로 무엇도 하지 못한 이름 없는 얼굴을 넘치게 기억하고 있다. 표지의 드로잉처럼 똑같은 형태의 수영모 뒤로 사라진 사람들.

누군가 성공한 이야기를 삶의 올바른 공식과 방향처럼 떵떵거릴 때 린 섀프턴은 스스로 패배한 역사를 최대한 촘촘히 기록해나간다. 그리하여 끝내 수영이 그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과거의 기억이 지금의 그를 어떻게 조각했는지 짚어낸다. 이 책의 백미는 후반부에 작가가 기억하는 수영장 일흔 곳의 어렴풋한 모습을 그려놓은 열두 쪽이다. 주변과 사람 모두 지워지고 다 똑같다고 생각했던 수영장의 형태만 남았다.

그의 작품 모두가 어떤 시기의 '끝'을 가리킨다. 관계의 끝, 질투의 끝, 유년의 끝. 그 끝의 정체가 궁금하여 작가에게 이메일로 물었고 그는 몇 시간만에 친절히 답해주었다.

"저는 무언가의 '끝'을 이야기하길 좋아합니다. 우리를 유령처럼 맴도는 이야기에 매료되어 있습니다. 《그 여자 예뻤어?》(청미래, 2009) 역시 숱한 끝을 다루고 있죠. 뒤를 돌아보고 그 과거가 우리를 어떻게 빚어냈는지, 지금을 정의하기 위해 우리가 어떤 식으로 과거를 이용하는지 관찰합니다. 큰 줄기로서의 인생은 이미 내 안에서 소멸된 작은 인생들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지나간 것, 죽은 것, 끝난 것'에 대한 관심을 늘 가지게 되죠."

(린 섀프턴, 이메일 인터뷰, 2014년 5월)

추상적인 장미를 머릿속에 아무리 채워 넣은들 곧 다가올 것이 장밋빛 폐허라면, 지나간 고통을 눈을 부릅뜨고 바라본다. 자, 이제 그만 잊으라 한 자의 시커먼 얼굴을 결코 잊지 않는다. 린 섀프턴의 책처럼 또렷한 것은 또렷한 대로, 실패한 것은 실패한 대로, 흐릿한 것은 흐릿한 대로 곳곳에 적어둔다. 벌써 이만큼 무뎌졌다고 자책하기보다 지금의 흐릿함마저 최대한 자세히 기록해둔다. 그의 책을 볼 때마다 나는 자꾸 혼자 머릿속으로 중얼거린다. "생활의 방향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이동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디에서 여기로 온 것인지 잊는 순간 비로소 인생이 직선으로 돌진하면서도 실은 그 자체로 부랑한다."

PRESENTED BY 볼보자동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