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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21일 10시 23분 KST | 업데이트됨 2017년 12월 21일 10시 23분 KST

문자와 문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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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방에 갔다가 호텔에서 지도를 찾던 중 마침 한 프랜차이즈 식당에서 배포한 지도가 깔끔하길래 가져왔다. 산맥과 사막 등 자연환경이 지워진 채 딱 두 가지 정보만 있었다. 고속도로와 미국 전역에 퍼진 그 프랜차이즈 식당 위치. 지도는 때로 세계의 요약본이다. 객관적 사실이라기보다 여러 사실 중 필요한 정보를 선택해서 축약해 놓는다. 정보의 가치는 또한 정치적이다. 골동품 상점에서 소련과 동구권 붕괴 이전의 지구본을 발견한 적이 있다. 지난 30년간 지리와 지형이 눈에 띄게 변하진 않았으나 인간이 만들어낸 정치 지형이 변했다.

미디어가 다양해지고 접근성이 높아져서 사람들은 과거의 그 어느 때보다 문자와 접할 기회가 많다. 많은 사람이 아침에 눈을 뜨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읽는다. 문자를 보는 사람이 많아졌다고 해서 글을 읽는 사람도 늘어났을까. 읽기는 인내심을 필요로 한다. 진득하게 문장과 문장 사이를 오가는, 곧 적극적으로 생각하기는 미디어의 정보량과 별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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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털 사이트에 '요약봇'이 생겼다. 농담처럼 말하던 '세 줄 요약'이 이렇게 실현되는가 보다. 포털 사이트의 '지식인'에 '과제 해야 하는데 무슨 소설 줄거리 좀 알려주세요'라는 질문이 적잖이 쌓이는 모습을 봤다. 이제는 한 편의 기사조차도 대신 요약을 해주는 시스템이 갖춰졌다.

인공지능이 기사를 잘 요약했는지 궁금해서 시험해봤더니 많은 한계가 보였다. 기사 본문에서 문장 세 개를 골라 이어붙여 놓았다. 맥락의 실종이다. 아는 인간이 아니라 '넓고 얇게' 아는 척하는 인간을 위한 시스템이다. 읽지 않음이 문제가 아니라, 읽지 않고도 읽었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다. 사회관계망서비스를 통해 기사를 읽지 않고 제목만 보고 리트위트하는 모습을 보면 자극적인 제목으로 클릭을 유도하는 언론의 가벼움만 탓할 수도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경제적으로 말하기 위해 줄임말이 있듯이 읽기의 경제성을 위해 요약도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말하고 경제적으로 읽다가 생각도 경제적으로 하게 생겼다. 요약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한 후 새롭게 소화시킨 독자적인 결과물이어야 하는데, 다른 이가 해주는 요약은 전체 맥락을 누락하고 있기에 사안에 대한 이해를 왜곡하기 쉽다. 같은 땅이라도 곡물생산을 중심으로 만든 지도와 교통정보를 위한 지도가 다른 정보를 담고 있듯이, 남이 해준 요약에는 그가 이해한 맥락이 담겨 있다.

빨리, 많이 알고 싶은 욕망이 이상하진 않다. 그러나 오늘날 '아는' 사람은 정말 많다. 너무 많이 알아서 아예 잘못 알고 있다. 또한 단편적 정보를 바탕으로 빨리 판단하여 입장을 정하는 일이 잦다. 판단할 수 없는 문제는 판단하지 않기를 선택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고 판단을 종용한다.

속도 경쟁이 생각하기를 방해한다. 속도 경쟁 속에서 다른 것은 다르게, 복잡한 것은 복잡하게, 모호한 것은 모호하게, 생각의 숙성을 기다릴 여유가 없다. 맥락을 찾고 화두를 이어가는 작업은 능동적으로 해야 한다. 화두를 찾는다는 것은 말길과 생각의 길을 찾는 일이다. 온 사방에 범람하는 '아무 말'은 정보는 과잉이지만 화두를 읽어버린 길 잃은 말들의 방황이다.

정보보다는 화두가 필요하다. 화두는 질문의 근원지다. 화두가 있는 삶을 산다는 게 쉬운 노릇은 아니다. 어쩌면 이 빠름과 요약을 권하는 시대에 부응하지 않으려면 더욱 불친절하고 느리게 생각하는 태도를 고집하는 게 낫다. 제 생각의 지도를 스스로 작성하면 길을 잃지 않는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