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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04일 11시 14분 KST | 업데이트됨 2015년 09월 04일 11시 14분 KST

내가 견딜 수 없는 육아의 클리셰

Shutterstock / Evgeny Atamanenko

올봄, 나는 잠이 부족한 3개월 아기의 엄마였다. 나는 페이스북 상태에 이렇게 썼다. “사순절 기념으로 나는 잠을 포기한다. #newmom.”

재미있지 않은가?

‘좋아요’가 45개 달렸고, 위로하고 공감하는 엄마 아빠들의 댓글이 몇 개 달렸다. ‘아멘!’, ‘그거야 쉽지!’ 등이었다. 그들은 내 농담을 이해했다. 부모로서 그들은 가능한 한 모든 것에서 유머를 찾으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했다.

그러나 이런 댓글도 발견했다.

‘헛소리 같이 들린다는 건 알지만, 아이가 나이 들고 나면 밤 늦게 껴안고 있는 걸 정말 그리워하게 될 거야. 그러니 지금은 힘들어도, 받아들이려 노력해.’

나는 그 댓글에 ‘좋아요’를 눌렀지만, 사실은 나는 그 댓글이 미웠다. 나를 정말 열 받게 했다.

‘받아들여라’, ‘이 시기를 즐겨라’, ‘이 순간을 포용하라’는 말들은 내가 제일 싫어하는 육아 조언이 됐다(어머니가 될 사람들에게 내가 이런 클리셰들을 말한 적이 있다는 사실은 더 싫다. 물론 내가 엄마가 되기 전이었다).

이번 경우를 포함해 사람들이 이런 충고를 던질 때는 대부분 갓난아기를 둔 엄마 노릇 하는 것의 나쁜 부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다. 내 경우는 수면 부족이었다. 좋은 의도로 한 말일 거라고 확신한다. 터무니없는 말들은 대부분 의도는 좋다. 하지만 이번에는 나는 화가 났다.

일단 나는 내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 말은 단 한마디도 안 했다. 수면 부족이라고 불평하지 않았다. 나는 ‘잠을 못 자서 안 좋다’고 말하지 않았다. 밤늦게 껴안는 일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참고: 엄마가 잠을 못 자는 건 ‘밤늦게 껴안는 일'과는 다르다. 때로는 아기가 안기기 싫어서 비명 지르고 몸부림칠 때도 있다. 그냥 울고, 먹고, 젖꼭지를 팔고, 소리 지르고, 놀고, 수다 떨고 등등을 하고 싶어할 때 하는 게 '밤늦게 껴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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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내가 잠을 자고 싶은 한밤중에도 그저 달갑게 수긍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인가? 사양하겠다.

엄마로서 아기를 키우는 모든 순간이 다 즐겁거나 소중한 것은 아니다.

사실 정말 안 좋은 때들도 있다. 내가 젖꼭지가 피투성이가 되는 것을 즐기지 않고, 더러운 기저귀 하나하나에 감사하지 않는다고 해서, 젖을 물리려고 45분마다 한 번씩 일어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즐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받아들인다'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는 정말 충분히 받아들이고 있다! 아기의 체액 말이다).

부모가 되고 나면 이미 충분히 힘들다. 육아의 모든 순간을 전부 즐겨야 할 것 같은 압력을 더 받을 필요는 없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엄마 노릇을 한다는 이 어마어마한 일 때문에 내가 쓰러져 울었던 낮과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른다. 나는 ‘자고 싶다’라든가 ‘난 이건 못해’, ‘혼자 있고 싶어’ 같은 이기적인 생각들을 한다. 내가 그다음에 하는 생각은 늘 ‘하지만 난 이 시간을 즐겨야 해. 모두 이런 시간을 즐기라고 말하잖아!’ 그러면 죄책감이 마약처럼 내 핏줄 속을 흐른다. 아, 죄책감. 압도적이다.

모성이란 귀중하다는 걸 나도 알고, 나도 동의한다. 아기들은 기적이다.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른다. 하루는 길지만 1년은 짧다. 그리고 밤새 잠을 못 자게 하는 아기를 갖고 싶어 괴로워하는 여성들이 전 세계에 수없이 많다는 것도 안다.

나도 다 안다. 죄책감에 대해 쓴 위 문단을 보라.

하지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사실이 있다. 나는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기면서 동시에 아기가 잠들기를 바랄 수 있다. 엄마가 된 것을 감사히 여기면서도 인간 같은 기분을 느끼고 싶을 수 있다. 내 아기를 사랑하면서도 흔들의자가 아니라 내 침대에서 자고 싶어할 수 있다. 지치고 자고 싶어하는 동시에 내 존재의 전부를 바쳐 아기를 사랑할 수 있다.

모성은 모 아니면 도가 아니다.

어떤 상황을 ‘포용하고’ ‘즐기고’ ‘받아들일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다. 한두 시간밖에 못 자는 밤, 내 가슴이 내 아들 입안이나 입 근처에 있어야만 달랠 수 있어서 웃옷을 벗고 앉아 있어야 하는 날, 옷을 갈아입을 때마다 아기가 내 옷에 토를 해서 옷을 세 번 갈아입고 출근하느라 지각하는 순간, 아기가 히스테리를 부리는데 나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어떻게 해야 나아질지 도무지 알 수가 없을 때. 이런 상황들은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다.

힘든 순간들은 가장 즐거운 때는 아니지만, 육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번 난 가르침을 얻는다.

엄마가 된 뒤 매일 나는 배운다. 성장한다. 모두 그럴 거라고 말했던 것처럼 쉬워지고 있다. 나는 요새는 ‘즐기는’ 때가 많다. 내 8개월 된 아기와 함께하는 시간이 아주 즐겁다. 첫 몇 주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이미 기억하기 힘들어졌다.

아들에게 언제나 내가 필요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들의 몸이 늘 작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육아의 가장 힘든 순간은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들을 영원히 안을 수 없다는 걸 안다. 나도 안다.

나는 최대한 자주 아이를 안고, 안는 것을 즐긴다. 아들은 겨우 35주밖에 안 되었지만, 이미 세상을 발견하느라 너무 바빠서 나와 가만히 앉아있는 일은 잦지 않기 때문이다.

아들의 아기 냄새를 맡고 통통한 볼, 허벅지, 배에 하루에 백 번 정도 키스한다.

아이를 안고 어르면 내가 품은 엄청나게 강렬한 사랑 때문에 눈물이 고인다.

자라서 옷이 작아지거나 기저귀 사이즈가 커지면 아주 슬프다.

아빠가 방에 들어올 때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면 녹아버린다.

내게 미소를 지을 때면 ‘내 마음이 이보다 더 충만할 수는 없을 거야.’라는 생각이 든다.

어른들이 쓰는 모든 표정과 극적으로 말을 멈추는 것까지 사용하며 내게 ‘말’을 할 때면 나는 엄청나게 웃고, 미소를 너무 지어서 볼이 아프다.

아들이 내 품에서 긴장을 풀면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쉰다. 아들에겐 내가 필요하고, 난 그때 아들에게 필요한 것을 줄 수 있다.

나는 우리가 누렸던 즐거움, 앞으로 경험할 즐거움들에 대한 생각이 마음속에 차올라, 지금 이 글을 쓰며 울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육아를 즐기고 있다. 육아 대부분을 즐긴다.

하지만 내가 아이를 안고 있는 대신 눕혀 놓고 재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밤이 한 번 있다고 해서 내가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피곤하다는 의미일 뿐이다.

*허핑턴포스트US의 블로그 The Parenting Cliché I Cannot Stand를 번역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