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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1월 09일 10시 33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1월 09일 14시 12분 KST

두 소녀 이야기 | 스스로 답을 찾는 교육에 관해

gettyimagesbank

벌써 십여 년 전의 일이다.

낯선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항공권 하나 손에 들고 전 세계를 무전 여행 중인데, 잘 곳이 필요하다는 열여덟 살 독일 소녀의 이메일이었다. 자신의 상황과 생각을 정리된 문장으로 설명하며, 정중히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직장에 매여 여행에 도움을 주기는 어렵지만, 숙소가 필요한 것이라면 편하게 와서 지내라고 답장했고, 얼마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정말 그 소녀가 나타났다.

170cm가 넘는 건장한 체구의 소녀가 자신의 키보다 훨씬 큰 배낭을 짊어진 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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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라면 아마 스마트폰을 꺼냈겠지만, 그녀는 배낭에서 꽤 묵직한 사진첩을 꺼내 보여주며 자신이 여행을 하게 된 사연과 계획을 들려주었다. 그 사진첩에는 그녀가 자라 온 환경과 그녀의 주변을 지탱해 준 사람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하이디가 연상되는 독일의 아담한 목가적 마을에서 자란 그녀는 대학 진학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 되자 마음에 떠오른 의문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았다고 했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정하지 못했는데, 무엇을 위해 대학에 가지?

이 상태에서 대학 진학에 자신의 시간을 쏟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 고민하며, 부모님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결과,

'하고 싶은 것을 찾을 수 있을 때까지 세상을 경험해보고 싶다'는 그녀의 의견에 부모님은 적극 공감하였다. 대학 입학 첫해에만 부모님의 재정 지원을 받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그 돈으로 부모님은 그녀에게 전 세계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는 항공 티켓을 선물해 주었다.

자신이 내린 결정이며, 항공권 이외 나머지는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 그녀에게는 당연했다.

그래서 그녀는 할 수 있는 모든 네트워크를 동원해서, 전 세계의 본 적도 없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도움의 손길이 열리는 곳으로 발길을 옮기며 세계를 돌았다.

자금이 없는 그녀의 여행은 지극히 단순했다. 투어나 맛집 탐방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었다.

강변이나 놀이터에 앉아서 주변의 아이들과 소소한 놀이를 한다거나, 거리를 거닌다거나, 사람들을 구경한다거나 하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그날 보았던 것들을 카메라와 머리에 담아두었다가, 저녁이면 그것들을 펼쳐놓고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이야기하고, 질문하고 메모하고 다시 또 질문했다. 열여덟 살이라고 믿기지 않는 통찰력과 새로운 시각에 나는 소름이 끼쳤고, 에너지를 느꼈다.

나에게는 그 만남이 잊히지 않는 기억이 되었다.

꽤 시간이 흐른 후, 그녀에게서 소식이 전해졌다.

여행 경비 마련을 위해 잠시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에, 그녀를 눈여겨본 고객에게 스카우트되어 일을 하게 되었고, 너무나 재미있고 적성에 맞아 관련 학과에 진학하여 전문성을 높이며 바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일 줄 알고, 스스로 답을 찾아갈 용기가 있는 그녀다웠다.

그 즈음, 그녀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이야기를 경험하게 되었다.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훌륭히 성장해주어서 정말 기쁘다며 직장 상사의 자녀 자랑은 마를 줄 몰랐다.

줄곧 우등생으로 자라 유명 대학교에 입학한 딸은 대학 입학 후에도 각종 상을 휩쓸었고, 대학에서 외국어 우수생으로 선발되어 해외 연수도 여러 차례 다녀왔다고 했다. 놀라운 스펙에 미모까지 갖춘 탁월한 인재 중의 인재였다.

그녀가 졸업을 앞두고 다시 한번 해외 연수의 기회를 얻어 미국에 다녀오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그로부터 얼마 뒤 곧 딸이 귀국한다며 재회를 몹시 기다리던 그가 갑자기 SOS를 요청했다.

내용은 이러했다. 딸이 공항에 늦게 도착하여 비행기를 놓쳤는데, 그쪽에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다른 항공편을 잡아주어야 하니 도움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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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할 수 있고 여행 경험이 많은 20대 성인이 자신의 실수로 비행기를 놓쳤다면, 공항에서 상황을 설명하여 해결하고, 다른 항공편을 예약하여 귀국하는 일은 스스로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왜 한국에 있는 아버지가 미국에 연락하여 그녀의 일을 해결해야 하는 걸까?

하루 종일 업무는 뒷전이고, 온갖 인맥을 동원하여 미국에서 성화를 내는 딸의 귀국을 도우며 진땀을 빼는 한 아버지를 보며,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성인이란 과연 무엇이고, 성인식의 의미는 무엇인가 허탈해지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나는 누구인가? 내가 마음 깊이 원해서 하는 것인가? 이것이 내가 만들고자 하는 미래로 가는 길인가?'라는 질문을 던진 소녀와

'이 대학에 합격한 나, 근사하지? 부모가 날 자랑스러워하는가? 친구들이 날 부러워하는가? 스펙을 올리려면 이것이 필요하겠지? 자격증 많으면 좋은 거니까' 타인의 시선에 치중한 또 한 소녀

위에 말한 두 소녀는 '나의 오늘'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달랐다.

'질문'을 들으면 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고민했던 '깊이'가 보인다.

시간을 들여 고민에 고민을 거듭한 후 자신의 생각에 연결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은 그만큼의 깊이 있는 답을 얻을 수 있다.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면 시간을 쏟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소중한 시간'을 쏟아 고민했다는 이야기는 그 사람이 그 문제에 대해 그만큼의 애정을 갖고 있다는 징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질문을 받는 상대방도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문제에 대한 질문에는 공을 들여 의미 있는 답을 하고자 애쓰게 되기 마련이다.

반면 얄팍한 질문을 던지고, 빨간 연필 선생님처럼 시험문제에 정답을 달아주거나 빨간 펜으로 표시해달라는 사람이라면, 그에 걸맞은 답을 얻어갈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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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해야 할 숙제와 고민을 영원히 대신해 줄 사람은 없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고 부딪혀보는 방법을 배우기에는 너무 늦은 걸까?

스스로 생각하고 가치를 만드는 것 이외에는 기계로 대체되는 시대.

주어지는 매 순간을 내 것으로 만들며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기회의 시기가 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쌓아가는 사람에게는 절망의 시기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