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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09월 30일 07시 22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09월 30일 14시 12분 KST

무용가의 섹스 안무 '미인'

미인

감독 여균동 | 출연 오지호, 이지현 | 2000

몇 년 전 '내조의 여왕'에서 김밥에 넣는 우엉처럼 비실비실하고 별 볼일 없는 남자를 뜻하는 '우엉남'이라는 조어에 어울리는 연기를 선보였던 오지호. 이후 케이블 채널 드라마를 통해 왕성히 활동하고 있는 오지호가 '연기의 맛'을 내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은 일이다.

드라마 '환상의 커플'에서 코믹 연기로 인기몰이를 하면서부터 오지호의 연기는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오지호는 데뷔 이후 오랫동안 아쉽게도 '연기력 보다는 몸이 먼저 떠오르는 배우'였다. 잘생긴 외모에 비해 아쉬운 연기력을 지녔다기보다, 데뷔작 <미인>에서의 몸 연기가 관객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줬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는 실연을 당한 누드모델(이지현)과 작가로 추정되는 남자(오지호)의 육체적 사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스토리는 존재하지만 요약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미약하다.

아무리 도망가도 결국 멀리 갈 수 없는 분단국의 로드무비 <세상 밖으로>부터 포르노적 상상력의 성장기 <맨>이나 영화계의 뒷이야기를 다룬 <죽이는 이야기> 등 종잡을 수 없는 필모그래피로 무장한 여균동 감독의 영화 <미인>은 참으로 엉뚱한 영화다. 배우들은 마치 책을 읽듯 대사를 하며 스토리는 몰입도가 떨어진다. 하지만 <미인>에서 중요한 부분은 내용도 아니고 배우들의 대사도 아니다. 바로 몸 연기다.

도발적인 무용가 안은미가 '섹스 안무'를 맡은 이 영화의 베드신들 속에서 당시 신인이던 오지호와 이지현은 제작진들의 의도를 잘 구현해냈다. 하얀 린넨 이불 아래, 남자는 여자의 다리 사이로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남자의 손은 사려 깊게 여자의 상반신 위로 유영한다.

두 사람이 하나가 되고, 여자는 다리를 접고 발끝을 펴 자신이 맞이하고 있는 아름다운 쾌감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손 끝 발 끝 마디 하나하나 섬세하게 신경을 쓴 안은미의 '안무' 뿐만 아니라 오지호와 이지현의 육체적 아름다움 역시 하나의 예술품과 같다.

또한 지나치게 기하학적이거나 전위 예술적인 체위가 등장하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몸이 마치 직소 퍼즐의 조각처럼 자연스럽게 잘 맞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 <미인>의 베드신이 가진 미덕이다.

어둡고 거친 화면이 아니라 화려하고 밝은 화면 속에서 벌어지는 누드의 향연은 영화 <미인>이 단순한 포르노그래피를 넘어서는 '누드 예술'임을 강조한다. 그런 모든 제작진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예술적 만족이 아니라 말초적 만족만을 원했다는 점에서 역시 엉뚱한 영화임에 틀림없다.

* 이 글은 필자의 전자책 '한국영화 사상 가장 에로틱한 순간 51' (페이퍼크레인, 2015)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