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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2월 21일 05시 26분 KST | 업데이트됨 2016년 12월 21일 14시 12분 KST

시간강사 문제, 교수들이 나설 때다

Shutterstock / hxdbzxy

최근에 나온 <나는 지방대학 시간강사다>의 저자인 김민섭씨가 지난 12일 돌연 대학을 떠났다. "왜 우리를 모욕하고 학교가 비리의 온상인 것처럼 썼느냐"는 동료들의 비난이 마음의 상처가 된 모양이다. 시간강사의 현실이 "패스트푸드 알바보다도 못하고", "지식을 만드는 공간이 햄버거를 만드는 공간보다 사람을 위하지 못한다면, 참 슬픈 일"이라는 그의 말이 가슴을 후벼판다.

지난주 몇몇 대학에서 열린 시간강사 문제에 관한 토론회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2010년 제정된 '시간강사법'에도 불구하고 시간강사들의 처우와 신분은 조금도 개선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토론회장에 앉아 있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려 견딜 수 없었다. 학문적 동료인 강사들의 고통에 '무뎌진'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어느새 교수라는 기득권에 안주해버린 자신의 모습이 문득 낯설었다.

근대 대학의 창시자인 훔볼트는 대학이란 "미래의 유토피아를 선취하는 곳"이라고 했지만, 이 땅의 대학이 보여주는 것은 끔찍한 디스토피아의 모습이다. 대학은 이 사회에서 가장 악랄한 노동착취 기구가 되었다. 시간강사는 교수의 10분의 1에 불과한 연봉을 받고 교육하고 있으며, 조교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고 행정업무에 내몰리고 있다. 대학만큼 임금착취가 자심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지금까지 대학교수들은 대학의 이런 비참한 현실에 애써 눈감아왔다. 특히 학문적 동료인 시간강사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는 데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물론 시간강사 문제는 구조적인 문제다. 허점투성이의 '시간강사법'과 교육부의 잘못된 정책, 수익만 좇는 대학당국 등 한국 대학의 고질적인 병폐에 근본 원인이 있다. 그렇다고 그동안 교수들이 보여온 무관심과 침묵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건강보험도 없이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강사료로 살아가는 동료를 곁에 두고 어떻게 교단에서 학생들에게 정의와 진리를 말할 수 있는가.

교수란 '앞에서'(pro) '말하는'(fess) 자이다. 앞에 나서서 진리와 정의의 이름으로 권력을 비판하는 것이 업인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수란 직업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험한 직업이다. 그렇기에 교수에게만 '정년보장'(tenure)이라는 특혜적 신분보장이 주어진 것이다. 정년보장은 '철밥통'이 아니라 '정의의 소리'를 지켜주기 위한 사회적 제도이다.

이제 교수들이 나서야 할 때다. 교수들의 침묵과 굴종이 대학을 오늘과 같은 흉측한 괴물로 만들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출발점은 학문공동체 안에서 무너진 정의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학문적 동료의 고통에 공감해야 하고, 대학 내에서 벌어지는 일상적인 불의와 착취에 함께 연대해서 저항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희생도 감수해야 한다.

시간강사는 교수들의 과거이고, 제자들의 미래이다. 교수는 과거의 시간강사이고, 학생은 미래의 시간강사이다. 시간강사는 학문 세계의 통과역이다. 그 통과역이 지옥이라면 누가 학문 세계에 발을 들이겠는가. 학문 세계에 들어온 자가 처음 경험하는 것이 불의와 부조리라면, 처음 느끼는 것이 자괴감과 후회라면, 그 나라의 학문은 이미 죽은 것이다.

독일의 경우 학문공동체의 구성원은 교수, 학생, 강사/조교의 3자이다. 강사는 대학의 3주체의 일원으로서 당당하게 대학운영에 참여하고, 합당한 처우를 누린다. 우리도 이제 대학 강의의 절반 이상을 담당하는 시간강사를 대학의 당연한 주체로 받아들이고, 그에 상응하는 처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더 이상 학문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낙오자가 되는 위태로운 길을 택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