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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로부터 5년이 지날 무렵, 그 사고를 세상 모두가 빠른 속도로 잊어버려 가고 있다고 느꼈죠. 이러다가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되어버릴까 너무 두려웠고 그것을 받드시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죠. 흔적를 남기면, 그것이 다음 세대의 생명을 구합니다. 사고로 죽은 사람들의 억울함과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상상하게 할 수 있는 뭔가가 남아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의 차이는 굉장히 큽니다."
"전문대 졸업이면 아예 일자리도 별로 없는 데다가 많은 기업이나 정부기관은 "병역"을 취업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잖아요. 병역을 거부하면 거의 같은 기간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고 출소 후에는 '전과자'가 됩니다. 전망이 없는 한국 사회가 원망스러웠고, 그런 한국 사회에 충격을 주기 위해서는 국외로 탈출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됐죠. 아버지는 육사를 나온 전직 직업 군인이셨는데 "니가 결정한 것이라면"이라고 하며 별로 말씀을 안 하셨지만, 어머니는 강하게 반대하셨습니다. "무조건 참아! 군대 가!" "감옥에 2년 가면 다시 만날 수 있잖아"라고 통곡하셨죠. 하지만 결국은 항공권과 생활비를 어머니가 마련해주셨어요."
거대한 '죽음'의 숫자가 쌓일수록 사람은 불합리한 죽음에 둔감해지고 정치적, 사회적 배경에 대한 생각을 중단하게 되지 않을까? 멀리 떨어진 중동에서 수만, 수십만명이 죽어가고 있는 분쟁에는 더욱 무관심해지지 않을까? 겹겹이 쌓인 수많은 죽음이나 어려움에는 하나하나 소중하고 통절한 배경이 있다. 그것을 하나하나 전하고 그 아픔을 공유하는 것이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경고하는 길이 아닐까. 고토 씨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마 그런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고토 씨의 죽음에 보답하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해외든 국내든 하나하나의 죽음이나 어려움을 마주보면서 소홀하지 않게 전하는 것이 아닐까.
평양에서는 고려호텔 방에서 인터넷에 접속할 수 있었고 일본판 기사도 평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속도도 빠랐고 검열이나 열람 규제 같은 불편도 못 느꼈다. 물론 방마다 비밀번호가 배당되어 있었고 실시간 감청은 가능했겠지만. 그런데 트위터도 페이스북도 가능했다. 한국 사이트는 모두 차단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중국보다는 자유롭지 않은가" 싶을 정도였다. 평양에 오기 전에 하룻밤을 지낸 중국에서는 트위터, 페이스북이 완전히 차단됐고, 구글도 못 쓸 정도로 느렸다.
평양에서 '고속도로'를 2시간 반 달리다가 차가 속도를 내며 옆길로 빠져 나갔다. 강원도 산길에 커다란 건물들이 나타났다. 2013년 12월 31일부터 영업을 시작한 '마식령 스키장'과 호텔이다. 이 시설은 불과 7개월 만에 완공됐다고 하는데 북한 언론이나 건설·농사 현장에서는 모두 작업 속도를 '마식령 속도'로 올리라고 재촉하고 있다.
청진 시내를 빠져나가, 일본인 성묘 방문단과 동행 기자들은 "한반도 6대 명산" 이라 불리는 칠보산으로 갔다. 안내원이 "일본인이 온 건 처음이 아닐까"라고 했다. 2014년 유네스코 생물권 보호구역에 지정된 칠보산은 국제관광구역으로 북한이 개발을 서두르고 있는데, 조선중앙통신에 의하면 단풍철에는 중국인 관광객들로 붐빈다고 한다.
평양을 빠져나가면 오직 몇십년 전 시대 같은 농촌 풍경만 펼쳐지는 북한. 그런데 연일 신문과 TV의 국제 뉴스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핵을 쥔 몬스터 북한. 이 차이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 농촌 풍경과 함께 마주친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보지 못할 것 같은 평양의 마천루, 그리고 이 나라의 어딘가에 있는, 우리가 접근조차 못하는 핵무기 개발 시설. 넉넉지 못한 나라의 막대한 자금이 투입되고 있는 이 두 곳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농촌 풍경의 낙차는 무엇일까.
김정은 정권에 들어서 영상 매체를 적극적으로 입국시키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 것 같다. 아사히, 요미우리 등 대표적인 신문사는 취재 신청조차 하기 어렵다. 안내인이 말했듯이 "영상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신문은 아무래도 기사에 기자의 주관이 들어간다"는 이유도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의 중요한 원인인 것 같다. 이런 가운데 인터넷 매체인 허핑턴포스트 일본판에 이례적인 동행 취재 허가가 나왔다. 취재 신청 협상도 어려움을 겪었지만 북한 입국 후 그들에게 "인터넷 언론"이 무엇인가를 이해시키는 것도 힘들었다.
매년 5월 3일에는 아사히신문 간부와 기자들이 모여 묵념하며 "언론에 대한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다"고 맹세한다. 아사히신문에서는 매년 이 시기에 언론의 자유에 대한 연재기사도 게재하고 노조는 대규모의 심포지움을 연다. 그중에서 매년 5월 3일에 큰 조화를 보내는 신문사가 있다. 바로 산케이신문 오사카 본사다. 한국에서는 흔히 "우익적"라는 형용사가 붙어 지면에서도 아사히와 대립하는 경우가 많은 신문이지만 입장 차이를 넘어 언론 탄압에 굴복하지 않겠다고 적극적인 지지를 표명해 주는 셈이다.
리쓰메이칸 대학에 다니는 일본인, 재일 한국인, 중국과 한국 유학생들이 춤추는 모습을 직접 촬영했다. 고등학교 때 참가한 한일교류 프로그램이나 미국 유학 시절에 만난 한국인, 중국인 친구들이 동영상을 이메일로 보내 주었다. 참가자는 100여명이나 됐다. 웃으면서 즐겁게 춤추는 것은 인종과 관계없이 인류 공통의 HAPPY다. "사람은 모두 '○○인'이기 전에 한 사람이다"라는 젊은 세대의 목소리가 동아시아에 펴져 나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