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uimang

비현실적 낙관론이 아니라, 아주 강하고 단단한 현실의 마음을 거기서 읽는다.
요즘 대학가는 입시철로 분주하다. 내년 2019학년에 입학하는 새내기들 대다수가 언제 태어났는지 아시는가. 서기 2000년이다. 대학의 21세기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물론 우리 삶의 양상이 달력에 따라 달라지진
허핑턴포스트US의 Girl With Cancer Receives American Girl Doll With Prosthetic Leg Like Hers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 암 때문에 다리를 잃은 10세 소녀가
많은 사람이 연말연시엔 금연이나 살빼기 등 자기 행동을 바꾸려는 '새해 결심'을 한다. 그러나 새해 첫 주 안에 결심을 포기하는 사람이 4분의 1이나 되고 대부분 중도에 실패한다는 심리학자들의 연구결과들이 있다. 사람들이
모두의 미친 짓 : 정부는 안 바뀌면서 교장·교사가 바뀌기를 바란다. 교장·교사는 안 바뀌면서 학생들만 바뀌기를 기대한다. 학부모는 안 바뀌면서 자녀가 바뀌기를 기대한다. 사회 일반인, 정치가, 교원, 부모들이 좋은 인성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면서 아동, 청소년들이 바람직한 인성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격차와 불평등의 심화, 소외와 차별의 난무, 서로 다름의 불인정, 자기 성찰은 게을리하고 상대방 공격에만 열중하면서 사회갈등의 완화와 사회통합을 기대한다.
나는 벤담의 공리주의자는 아니다. 하지만 고색창연한 도덕이나 설익은 정의를 외치기보다는 개인의 구체적인 행복을 말하는 것이 정치의 도리라는 데는 동의한다. 행복이 추상적이면, 권력자의 도덕이나 정의 타령과 다를 바 없다. 행복은 벤담의 '침대의 기록'만큼 구체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루쉰의 희망은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절망과의 끊임없는 싸움일 뿐이다. 따라서 희망이란 싸우는 자만이 내뱉을 수 있는 말이다. 아마도 새해가 희망인 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간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의 해결은 정확히 그 반대방향이어야 한다. 비정규직이 되어도 살 만할 때만 정규직의 삶이 안정될 수 있으며, 실업자가 된다 한들 버텨낼 만해야 비정규직의 삶도 개선될 수 있다. 누구든 정규직이 될 수 있다는 말과 누구든 실업자가 될 수 있다는 말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현실적인 진술인지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복지에도 '낙수효과'란 없으며 우리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건 이런 의미로 해석되어야 한다. 바로 지금 어느 누구의 삶도 위태롭지 않으므로 나 또한 어떤 일이 일어나도 견딜 만하리라 확신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불안을 해소하는 궁극의 방법이며 삶의 연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