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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종일 인터넷을 붙잡고 있다. 예술인복지재단 창작지원준비금 신청을 하려고 오전 10시부터 눈 뜨자마자 컴퓨터 앞에서 지금까지 씨름 중이다. 사이트는 폭주해서 다운되고, 전화를 해도 통화 중이고,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다. 그 돈이라도 받으려고 아등바등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상상된다. 오늘을 위해 일주일간 건강보험증도 발급받고, 겨우 건강보험 납부확인서도 받아내고, 소득이 없다는 사실증명 등 서류도 준비했는데...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건가 싶다.
나와 다른 방식으로 듣고, 보고, 느끼는 존재가 옆에 있다. 이 존재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모든 타자가 그렇듯. 커리에게 나는 어떤 움직임일까. 인터넷에서 '강아지가 좋아하는 음악'을 검색해봤다. 레게음악이 좋다고 한다. 아침마다 레게음악 플레이리스트를 틀어놓았다. 커리가 정말 좋아하는 것인지 잘 모르겠다. 커리는 취향이 없을까? '인간이 좋아하는 음악'이 덩어리로 있는 게 아닌 것처럼, 커리가 좋아하는 선율과 리듬이 있을 거다.
'성판매 여성 안녕들 하십니까' 페이스북 페이지는 성노동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공간이다. 얼굴 없는 사람이 얼굴을 드러낼 수 있는 고맙고 반가운 곳이었다. 그러나 얼마 전 페이스북 코리아는 이곳을 음란물 페이지로 규정했다. 많은 사람의 항의로 다행히 규제는 풀렸다. 창녀의 추억 따위가 남성 작가의 문학작품으로 나오고, 영화마다 화려한 배경으로 창녀가 등장하는 땅에서 창녀가 자기 목소리로 자기 이야기를 하는 건 음란물이 된다. 성노동자는 스크린 속의 미학이거나 환상 속 악마, 팜파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어쩌려고 했어요?" 인도에서 만난 한국 남자가 내 어깨의 타투를 보고 말했다. "왜요? 이게 뭐 어때서요?" "여기서는 괜찮은데 한국 가면 어쩌시려고요." 그의 무례한 걱정만큼 한국 사회에서 여자가 하는 타투는 편견을 몰고 다닐 수 있는 일이다. 타투는 내 의미를 각인하는 것인데 어떤 시선에서는 낙인으로 돌아온다. 타투가 범죄자의 낙인이거나 종교의 부적이던 역사는 길다. 나에게 타투는 낙인이라서 부적이다. 편견이 많은 사람을 막아주는 방패랄까. 타투 덕분에 '여자가 타투를 하면 싸 보입니다'라고 말하는 사람과 인연이 닿지 않아서 좋다.
인도에서도 대마초는 불법이지만 캐나다, 네덜란드, 미국 몇개 주 등 대마초를 허락한 나라도 많다. 세계적으로 대마초를 비범죄화, 합법화하기 위한 토론이 활발하다. 국내에서는 몇 해 전 유명 영화배우, 감독 등이 '대마 합법화 및 문화적 권리 확대를 위한 문화예술인 모임'을 만들고 위헌 소송을 했지만 수용되지 않았다. 얼떨결에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나는 대마초가 합법인 나라에서 대마초를 피워도 불법이 된다.
두 번째 강연 주제는 '차별금지법과 동성애 독재'. 변호사라는 강연자는 강연 내내 '동성애 독재', '표현의 자유'를 자주 입에 올렸다. 차별금지법이 합법화되면 동성애 독재가 시작된다고 주장하던 그는 점점 격앙되더니 소리 높여 "저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동성애를 외치지만, 동성애를 반대하는 사람들의 자유는 무시합니다. 우리에게 자유가 있습니까"라고 말했다. 표현의 자유는 혐오할 자유가 아니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학문의 자유,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가 사라지는 독재 시대가 찾아옵니다"라고 주장했다. 헷갈렸다. 이곳은 대학인가.
"합법화를 통해 동성애가 보호되면 가장 큰 문제점은 동성애를 반대하는 많은 국민의 양심과 표현, 종교와 학문의 자유가 억압되는 데 있다." ㅎ대학 학보에 실린 동성애 합법화 반대 칼럼에 있는 문장이다. 같은 주제의 기사가 두 번씩 연이어 게재되었고, 학생들에게 비판을 받자 학보사는 "특정 인물에 대한 비난, 욕설, 범죄의 소지가 있는 글을 제외한 모든 글을 싣습니다"라고 해명했다. 동성애자는 특정 '인물'도 아닌 걸까. 학보사 기자는 동성애를 차별하는 거냐고 묻는 '사상검증'은 옳지 않으니 '검열'할 수 없고 동성애를 반대하는 기사는 표현의 자유라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신념을 밝혔다.
우울증은 어떤 병일까. 누군가는 만들어진 질병이라고 하고, 누군가는 지나가는 감기나 극복해야 할 병이라고 말한다. 여성학자 모린 머독은 우울증을 자발적으로 소외되는 시간이라고 했다. 빛나는 위쪽, 목표로 향하는 남성 중심의 경기장에서 이탈해 나무와 진흙을 만나는 시간. 내게도 그런 시간이었다. 우울증은 손가락에 물감을 묻혀 그림을 그리게 해주고, 타인의 슬픔 속에 머무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광장을 맨발로 걸어 다니게 하고, 꿈에서 진흙을 밟게 도와주었다. 길을 잃으려고 땅속으로 하강했던 것이다. 길을 찾으려고.
이미 합리 남용 사회다. 약자 혐오와 편견도 합리의 이름으로 작동된다. '비합리'적인 여성, 성소수자, 동물에 대한 합리적인 '그'들의 우월의식이 폭력을 정당화해왔다. 현대인은 자신의 감정, 어젯밤 꾸었던 꿈이나 느낌에 권위를 주지 않는다.
나는 나의 섹슈얼리티 경험을 연재하면서 남성들에게 많은 댓글과 메세지를 받아왔다. 대표적인 메세지는 이런 것들이다.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다" "필자가 그런 남자들만 만나고 너무 극단적인 경험만 해온 것 아니냐" "자극적인 소재로 인기몰이 하려는 거냐" "강간범을 신고 안 하고 뭐했어?! 신고해!" "남자도 비슷하게 힘들다, 너무 남자 여자 갈등을 부추기지 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꼭 있다. 여성의 날을 기념하며 그들에게 보내는 편지.
고기를 안 먹는 내게 어떤 사람들은 "고기를 먹어야 기운 나고 영양보충이 되지"라고 건강을 염려해주거나 "식물도 고통받는데 식물은 왜 먹어?"라고 논박한다. "채식을 한다고 세상이 변하는 건 아니야"라고 진단해주기도 한다. 고기를 안 먹는 게 별나고 무모한 일이라고 설득하려는 열정이 대단하다. 내가 특이한 게 아니다. 비인간 동물이 고기가 되는 과정을 보면 누구나 (실패로 끝날지언정) 채식을 결심하지 않을까. 공장식 축산과 육류 소비의 진실을 담은 글과 영상도 많다. 한번쯤 관련 영상을 보라고 추천해주면 대부분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한다. "저 그런 거 일부러 안 봐요. 고기를 못 먹게 되니까요!"
"기특한 개념녀, 지켜주고 싶은 우리의 효녀"라는 말들은 단어 선택만 달랐지 지금까지 맺어온 남자선배,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주로 느꼈던 '애정'의 표현이 아니었던가. "너는 우리의 꽃이야, 빛이야, 간판이야" 따위의 표현 말이다. 그런 공기를 마시고 살아온 사람이 공기가 잘못되었다고 느끼기란 쉽지 않다. 뭔가 이상하고 찝찝한데,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작은 것에 분개하지 말고 대의에 집중하자'고 생각했다.
동거하기 전, 우리는 자주 모텔에 갔다. 섹스할 곳이 없었으니까. 모텔은 비싸서 DVD방에서 황급히 일을 치르기도 했다. 어느 날 섹스 후 그가 말했다. "우리, 이제 너무 자주 모텔에 오지 말자." "응. 왜요?" "사람들이 그렇게 볼 수도 있어. 혁명한다는 애가 여자랑 이런 데를 와? 하고 말이야." 수긍했다. 모텔에서 나오는 길에 아는 사람과 마주칠 때 민망했으니까. 그런데 그의 말이 왠지 거북했다. 나는 그저 '여자'이고 우리가 교감하는 이곳은 '이런 데'일 뿐인가.
'달관세대'. 나는 꼭 그 모습으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누가 만들었는지 참 무례한 이름표다. 국가생산에 도움이 안 되고 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는 젊음을 비아냥하려고 만든 이름이 아닌가. '엔(N)포세대'라고도 불린다. 나는 취업 대신 글과 그림으로 노동한다. 결혼 말고 동거한다. 누구의 딸, 누구의 아들 말고 온전한 주체로 만나기 위해서다. 아이를 낳지 않기 위해 동거인은 정관수술을 했다. 여성의 피임보다 안전하고 확실하니까. 우리는 취업 결혼 출산을 선택하지 않았을 뿐, 삶을 포기한 적 없다.
촛불집회는 시간이 지날수록 힘찬 구호와 대열이 만들어졌다. 그 속에서 동떨어진 옷을 입고 있는 나는 이방인 같았다. '도서관에 하이힐 신고 오는 여자들 이해가 안 돼' 라는 수군거림처럼, '집회 나오는데 치마입고 하이힐 신은 것 봐' 하는 수군거림을 들었다. 한번은 내가 너무 짧은 바지를 입었다고 선배에게 주의를 받았다. 시민들을 만나는데 옷이 너무 짧으면 보기가 좋지 않다는 이유였다. 궁금했다. 짧은 바지는 진정성이 없어 보이는 걸까? 조직에서 나는 치마 혹은 짧은 바지를 입거나 화장을 하면 운동의 진정성을 의심받았다.
얼마 전 조류인플루엔자(AI) 확산 뉴스를 듣고, 사람들은 말했다. "조류독감 유행이래, 조심하자." "치킨은 그래도 먹을 거야." "경제적 손실이 엄청나대." "대기업은 좋다는데?" 왕왕 한 말들 가운데, 땅속에 파묻힌 2500만개의 심장은 없다.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을까. 사람도 먹고살기 힘드니까, 내 오늘이 고통스러우니까, 인간의 존엄이 우선이니까. 2500만번의 비겁이다. 살아생전 햇볕 한 줌 받지 못한 존재들이 처음 햇빛을 만난 날 땅속에 묻혔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 때문에.
데이트폭력은, 다른 폭력과 마찬가지로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폭력을 행사한 폭력 `사건`이지, 여자친구가 맞을 만한 짓을 해서 남자친구가 어쩔 수 없이 때리게 된 `사연`이 아니다. 피해자가 폭로라는 최종의 수단을 쓰는 이유는, 가해자가 자신의 가해사실을 인정도, 반성도 안 하기 때문이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릴 곳도 받아줄 곳도 없다. 가해자를 특정하지 않으면 그들은 끄떡없다. 그래서 피해자는 모든 비난과 모욕과 수치심을 감내하고서 어렵게 증언을 한다.
올해 1월 내 삶에 해일이 밀려왔다. 위반부 한일협상 반대 예술행동에서 즉흥적인 퍼포먼스를 한 날부터다. 대한민국 효녀연합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언론과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오르내렸다. "희생해줘서 고맙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난 희생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메시지들도 많다. "승희 씨는 우리나라의 희망이고 대한민국의 효녀입니다. 계속 힘써주세요." "우리의 애국소녀. 내가 지켜줄게요." 나는 국가라는 무대에서 국민이라는 역할극을 하고 싶지 않다.
재물손괴죄와 일반교통방해 혐의로 검찰이 기소한 활동가 홍승희 씨에게 법원이 50만 원의 벌금형을 선고했다. 지난 21일 검찰은 홍승희 씨에게 2014년 종각역에서 대규모 집회가 있었을 때 낚싯대에 노란 천을 단 걸 들고
기억해야 할 것은 장애인 이동권은 당연한 상식이고 권리라는 사실이다. 이런 허접한 정부와 싸우고 있다고 해서, 우리의 기준이 하향평준화되면 안 된다. 인권의식이 후퇴되는 걸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것이 누구이든. 상식을 행해온 '영웅'도 예외가 아니다. 영웅은 없다. 상식을 행하는 사람을 특별히 칭송할 이유도 없다. 영웅이 뭔가를 하길 바라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그 만큼의 상식을 살면 되는 거다. "위대한 사람"을 영웅으로 칭송하거나, "불쌍한 사람"을 시혜적으로 도와주는 게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사는 인간으로 연대하면 되는 거다. 상식 이하와 싸울 때일수록 내 상식을 점검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