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gyeore21

‘무엇을 상상하건 그것보다 더 떠든다’ 19대 대통령 선거 개표 방송을 ‘콜라보’하는 '한겨레21'과 '허프포스트'의 각오다. 심층 탐사 매체인 '한겨레21'과 앞서 나가는 미디어 '허프포스트'는 페이스북 대선 라이브를
2014년 4월16일 오전 11시께 YTN이 “학생 전원 구조”라고 보도하고 있다. 학교 관계자 가족은 “학생들이 전원 구출됐다”는 40대 여성의 목소리를 듣고 단원고 강당에서 마이크로 “학생들이 전원 구조됐다”고 말했다
스트로가츠가 <뉴욕타임스>에 연재한 수학 칼럼에는 이런 이야기들이 가득한데, 'X의 즐거움'은 그 글을 모은 책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수학을 알게 되면 몇 명과 연애를 한 뒤에 결혼 상대를 선택하는 게 좋은지도 알 수 있다고 독자들을 유혹하는데, 사실 그런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 우리는 수의 세계에 흥분하게 되고, 인간이 화성에 탐사선을 보낼 수 있었던 위대함도 만고 쓸데없는 수학에 매력을 느낀 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리스트릭타는 위성항법장치(GPS) 칩을 내장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나서보자. 리스트릭타는 내가 가는 곳마다 거기서 얼마나 많은 사진이 찍혔는지 알려준다. 근방에서 찍은 사진이 너무 많다면, 카메라는 자동으로 뷰파인더를 닫고 셔터를 잠근다. 알고리즘이 스스로 촬영을 중단하도록 조작하는 것이다.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 콜레라 시대의 사랑 >. 어디선가 이 책이 밸런타인데이 추천도서라고 하던데, 이 책은 51년 동안 첫사랑을 기다린 한 남자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 당연히 목록에 올라갈 만하다. 그러나 정작 < 콜레라 시대의 사랑 >에서 마주하게 되는 건, 매끈하고 감동적인 스토리가 아니라 10대에서 70대가 된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엉망진창인 상황들이다.
낙인이 찍힌 소수자 집단의 구성원이 겪는 만성적 스트레스를 뜻하는 '소수자 스트레스'는 사회적 지지나 사회·경제적 지위가 낮음으로 인해서도 발생하지만, 편견과 차별이 주된 요인이라는 사실이 여러 경험 연구를 통해 입증된 바 있다. 차별금지법조차 없는 한국의 경우라면 그 정도가 더 심할 것이 명약관화하다. 성소수자 중 28.4%가 자살을, 35%가 자해를 시도한 적이 있다는 구체적인 보고도 있었다(친구사이·2014). 특정한 속성을 가진 소수자들이 다수자들의 편견과 차별 때문에 그 공동체에서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누리지 못한다면 어떠한 방식으로든 공적 개입이 불가피하다.
한국 사회에서 나이 먹는 일은 공포스러운 일이다. 다들 느긋하게 여유를 즐기는 노년을 상상하지만, 바로 뒤 묵직한 질문이 따라온다. '그 여유를 위해 얼마를 모아두어야 할까? 그만큼을 모으기 위해 나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할까?' 금융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이야기했던 5억원설, 10억원설, 20억원설이 머리를 스쳐간다. 나는 노후준비에 대한 질문을 바꿔볼 준비가 되었는가? '노후에 얼마가 필요한가, 그 얼마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을 과감히 폐기하고, '노후에 나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던져볼 수 있는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었는데, 헤어지자는 말 한마디에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된다. 의미의 집합체인 사랑이 그런 것이었다니. 이렇게 하찮은 것이었다니. 그래서 연애 경험이 너무 없어도 안 되겠지만, 연애를 많이 해본 이들과 사귀는 건 쉽지 않다. 자신이 찼든 차였든, 그런 허무를 거푸 경험한 이들의 마음속에는 꼭 냉소가 숨어 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는 그 차가운 마음을 감싸주는 따뜻한 개그다.
1) "Roh는 17세였고 그의 지능지수(IQ)는 69였다. 그는 6세 때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린 결과 뇌에 결함이 생겨 고통받았다." 2) "잠재적인 범죄자나 다름없는 외국인에 대해 감시와 통제를 강화해도 부족할 판에 다문화 입학전형? 더 이상의 외국인 우대정책은 우리 사회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 뿐이다." 이 둘 모두 대학교수가 한 발언이라면, 과연 어느 쪽의 해악이 더 클까?
링크가 없는 것도 문제지만, 정직하지 못한 링크는 더 치명적인 독버섯이다. 본문 속 '핀테크' 글자에 걸린 링크를 누르는 독자는 무엇을 기대할까. 핀테크 용어 설명 페이지나 관련기사가 떠야 정상 아닌가. 뜬금없이 사설 대부업체 광고가 뜬다면 독자는 기만당한 느낌을 받게 마련이다. 정직하지 못한 링크는 웹의 속성을 왜곡하는 도둑질이요, 독자를 기망하는 사기 행위다. 2015년 대한민국 뉴스 웹사이트는 그 자체로 거대한 현실왜곡장이다.
"사랑한다는 말은 아는데, 사랑한다는 게 뭔지 몰라." 이제까지 연애를 안 해본 것도 아닌 사람이, 그것도 대인관계도 매우 좋고 성격도 활발한 이가 이렇게 말했다. 그 고백이 순간 스산했지만, 뒤돌아 매우 반가웠다. 사랑이 그리 알기 쉬운 것이라면 이토록 힘들 리도 귀할 리도 없다.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감우성이 했던 대사가 이랬던가. 너나 나나 13살 때부터 끊임없이 누군가를 사랑해왔어. 그런 우리가 한 사람만 사랑할 수 있을까. 그 대사는 바로 이런 뜻이었다. '나는 모른다, 사랑을.' 그 말을 듣고 <연애소설 읽는 노인>이라는 소설을 떠올렸다. 그 소설에도 비슷한 대목이 있다.
'미국은 혐오표현을 관용한다'는 것은 엄밀하게 보면 틀린 말이다. 관용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처벌법을 두고 있지 않을 뿐이다. 실제로도 혐오표현 문제를 비국가적 기제로 규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고, 혐오표현이 실질적 차별이나 폭력을 야기할 때는 오히려 다른 나라들보다 더 강한 강제력을 동원하는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아홉수 따위를 믿지는 않지만, 왜 그 스물아홉이 엿 같은지는 정말 뼈저리게 알 것만 같다. 그 나이가 되자 거짓말처럼 모두가 약속이나 한 듯 내게 엿을 선물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자꾸만 내게 청첩장을 쥐어줬고, 사소한 말다툼이라도 일어날라치면 가족은 내게 "얼른 시집이나 가버리라"는 폭언을 했다. 그러나 나를 가장 참을 수 없이 만드는 것은 이렇게 단순하게 한 번 빡치고 마는 사건들은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내 옆에 있는 그 남자친구가 내게 결혼 이야기를 전혀 꺼내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나를 아홉수를 처절하게 맞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하고 초조한 여자로 만들고 있었다.
"남자나 여자를 만날 '때'가 왔는가는 보이지. 그때가 언제인지는 말해줄 수 있어. 하지만 그때가 와도 자기가 노력하지 않으면 연애가 안 돼. 무엇보다 '사이가 좋을 때'는 절대 물으러 오지 않아. 사실상 나쁜 운명이었다 해도, 좋으면 그냥 넘어가고 있다는 거지. 그게 뭘 뜻하겠어? 운명의 짝 같은 건 없다는 거야. 남녀 관계 같은 거 물어보지 마. 자기한테 해가 되는 사람은 그냥 헤어지면 돼."
"내가 왜 화났는지 정말 모르겠어?" 남자들에게 이 말만큼 진땀나는 질문이 또 있을까. 단언컨대, 모른다. 정말 모른다. 부디 여인들이여, 그냥 말을 해 줘. 이럴 때 그대 기분을 대신 알려주는 기기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사물인터넷과 센서 기술은 우리 곳곳을 감지해 시중을 들지만, 아직까지 미개척지는 남아 있다. 센서로는 감지하기 어려운 비물리적 세계, 이를테면 생각이나 감정 말이다. 정보기술이 이젠 이 영역까지 '접속'하려 들 심산이다. 생각이나 감정을 읽어내 그에 맞는 적절한 조치를 내려주겠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도 식민지배를 찬양하거나 5·18 민주화운동을 왜곡하는 표현을 처벌할 필요가 있을까? 일제 청산과 민주주의가 우리 헌법의 핵심적인 가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러한 발언이 폭력이나 소수자 차별을 야기할 위험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을 것 같다. 다시 일본의 식민지가 되자고 선동하는 것도 아니고, 쿠데타를 부추기거나 군부독재로의 회귀를 획책한다고 보기도 어렵다. 보수 진영에서는 민주화운동 부정을 처벌한다면,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과 '근대화의 기수, 박정희'의 성취를 부정하는 것도 처벌하자고 나설 것이 불 보듯 뻔하다.
액티브X를 향한 정부의 구애는 포만감도 모르나보다.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은 마침내 웹브라우저와 한 몸처럼 '플러그인' 돼버렸다. 애달픈 정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연인의 옷자락을 붙들고 외친다. "액티브X 좀 더 쓰게 해주세요, 제발." 이런 한국 정부를 매정하게 걷어찬 이는 마이크로소프트(MS)다. MS '윈도10' 심장엔 이름마저 폼나는 '엣지'란 웹브라우저가 들어섰다. 이 엣지에 액티브X 따윈 안중에도 없다. MS는 '정부' 대신 웹표준이란 '본처'에게 돌아갔다. 구글도 매한가지다. 구글은 9월부터 크롬 웹브라우저에서 'NPAPI'를 아예 막아버릴 심산이다.
가장 큰 문제는 '비일관성'이다. 진보와 보수 할 것 없이 표현의 자유를 일관성 없이 정략적으로 이용한다는 혐의가 있다. 자기 편이 하는 말에는 무제한적 표현의 자유를 주장하고 상대편이 하는 말에는 그 위험을 과장해 처벌을 주장하곤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부당하게 종북 시비를 거는 자를 처벌하자고 하면, 똑같은 논리에서 천안함 의혹을 제기하는 것이나 대한민국의 역사적 정통성에 대한 문제제기도 '그만큼' 위험하니 처벌해야 한다는 반론에 부딪히게 된다. 이러한 논란은 '서로 건드리지 말자'가 아니라, '이것도 규제하고 저것도 규제하자'는 식으로 발전하기 십상이다.
혐오표현은 자정에 맡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소수자의 사회적 힘이 충분하다면 혐오표현은 얼빠진 사람이나 하는 실없는 소리로 전락한다. 이 정도라면 국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소수자가 '자연스럽게' 강력한 힘을 갖게 된 사례는 찾아볼 수 없다. 현실적으로도 소수자에게 '맞받아치면 되는 거 아니냐' '무시하면 된다'는 조언은 한가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가 인권보호를 위한 공적 개입을 주저하지 않는 이유는, 인권은 그렇게 '자정'에 맡긴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혐오표현은 소수자 '차별'에 대한 문제다. 그런데 한국에는 차별금지법조차 없다. 국가인권위원회법과 국가인권위원회가 초보적인 수준의 차별금지법과 차별 시정 기구 구실을 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그나마 있는 법과 제도조차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 현재 수준에서도 혐오표현에 대한 다양한 조치가 가능함에도 인권위는 요지부동이다. 유감스럽게도 국회가 이 문제를 집요하게 따지고 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또한 혐오표현을 형사처벌하는 국가들에는 차별금지법도 있기 마련이다. 차별 문제를 다루기 위해 차별금지법을 마련해놓고, 더 나아가 차별을 조장하는 발언'도' 처벌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