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wonseokcheon

"하필이면 또 세상에 (대통령이) KBS를 오늘 봤네"라며 대통령 한 사람을 위해 기사를 빼라는 것이 홍보수석이 할 일인가. 대통령이, 홍보수석이 '해경 부실 대응' 보도를 봤다면 응당 분노가 향해야 할 곳은 해경 아닌가. 더욱 놀라운 건 문제의 통화가 "홍보수석의 통상적 업무"라는 대통령 비서실장의 발언이다. 만약 판사들에게 전화를 걸어 "판결 내용을 바꿔 달라" 고 주문하는 녹취록이 공개됐다면 세상은 뒤집어졌을 것이다. 언론의 자유도 재판의 독립만큼 소중한 가치 아닌가.
대법관은 판사들의 승진 코스에 그쳐선 안 된다. 대법원엔 소수자와 약자, 인권, 노동에 대한 감수성을 지닌 '비주류'들이 필요하다. 오는 9월 퇴임하는 이인복 대법관의 후임을 정해야 할 때다. 대법원 구성의 다양화는 이제 출신의 다양성을 넘어 생각의 다양성이어야 한다. 중요한 건 누구와 부딪치며 살았느냐, 어떤 가치를 붙들고 싸웠느냐다. 대법원이 달라져야 기울어진 운동장을 조금이나마 평평하게 만들 수 있다. 산업현장에서 아들 잃은 어머니, 아버지 잃은 아들딸의 눈물을 닦아줄 저스티스(대법관)를 고대한다.
돈이 모든 것을 말해주는 세상 한 구석에서 민간 잠수사 한 명이 숨졌다. 43세 김관홍. 2014년 세월호 선체 수색에 참여했던 그는 당시 무리한 잠수 후유증으로 생업인 잠수 일을 접었다. 꽃가게를 하는 아내를 돕고 대리운전을 하며 생계를 이어왔다. 시신을 수습하고 '세월호 의인'으로 불렸지만 의사상자 지정을 받지 못했다. 연 386조원의 정부 예산 가운데 그를 위한 돈은 없었다. 세금은 대체 어디에 쓰이는 것인가. 매달 나가는 세금에 꼬리표를 달아서라도 어떻게 쓰이는지 알고 싶다.
이제 교사 성폭행 사건은 기억 저 편으로 사라지고 있다. 남성 세 명에겐 중형이 선고될 것이다. 만약 '교사, 학부모, 섬마을'이란 키워드를 뺀다면 어떻게 될까. 지난달 대전고법은 또래 여중생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중학생 10명 전원에게 실형을 선고한 1심을 깼다. "나이가 매우 어리다"며 3명의 형량을 깎고 나머지 7명은 가정법원 소년부로 보낸 것이다. 지난 1월 인천에선 술에 취해 잠든 10대 여성을 성폭행한 20대 4명이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지난해에는 가위 바위 보로 순서를 정해 후배를 성폭행한 대학생 3명이 항소심에서 징역 4~6년에서 징역 3~5년으로 감형됐다.
사태를 방관하다 '특단의 대책'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게 이 정부의 습관이다. 그 특단의 대책이란 것도 문제를 단순화하고, 우리와 '그들'을 분리하고, 정책의 우선순위를 잘못 매긴 것이다. 그 결과 반발이 적을 소수자와 약자, 고등어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차별과 편견에 기대 쉽고 편한 해결책을 탐한다. 불편을 감수하고 고통을 분담하자고 설득할 자신이 없는 것인가. 아니면 현재 이대로가 좋은 것인가. 영화 '곡성'에서 초등학생 딸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나는 이 질문을 해외에서 "링거 고군분투"(청와대 브리핑)를 하고 오신 대통령과 정부 당국자들에게 드리고 싶다.
그가 2~3년을 죽을 고생 해야 손에 쥘 수 있는 '꿈의 돈' 5000만원은 홍만표·최유정 변호사가 전화 한 통으로 받는 액수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홍·최 변호사의 죄질이 나쁜 이유는 오피스텔·상가를 100채 넘게 갖고 있다거나 수임료 100억원을 벌어들인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국민 세금으로 검사·판사 월급 받으며 배우고 익힌 노하우를 유감없이 재활용했다.
솔직하게 이야기하자. 그런 상황에서 탐사 저널리즘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비용 부담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주 좋은 탐사 보도를 한다 해도 상호 경쟁적인 콘텐츠의 폭발 속에서 수용자의 인정조차 받기 어려워 동기 부여도 안 된다. 큰 사건이 터져 수용자의 주목도도 높고 취재비용도 저렴해진 상황에서나 하이에나형 탐사의 자세를 취할 수 있을 뿐이다. 이에 어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우리 언론은 '단독'이라는 말을 참 좋아하는데, 이제 '단독의 시대'는 지나갔다는 걸 인정하는 게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미끼를 던졌기 때문이 아니라 미끼를 물었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됐다는 건 성폭행의 책임을 피해 여성에게 묻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밤늦게 다니지 마라." "짧은 치마 입고 다니지 마라." "인적이 드문 곳에는 가지 마라." 이런 말들도 미끼를 던진 자의 책임이 아니라 미끼를 무는 자의 책임이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이 논리는 세상의 모든 피해자에게 무한 반복된다. "왜 세월호에 올랐느냐. 왜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했느냐. 왜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 갔느냐."
'묻지마 범죄'란 말에서도 나태함이 느껴진다. 불특정인을 대상으로 특정한 동기나 계획 없이 저지르는 범죄를 뜻할 터. 하지만 '묻지마'가 붙는 순간 가해자와 피해자의 개별적 삶은 증발되고 사회적 맥락은 생략되기 일쑤다. 강남역 인근 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은 과연 경찰 발표처럼 '묻지마 범죄'인 걸까. 정부 발표대로 화장실 개선한다고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지난 5년간 피해자들을 투명인간으로 만든 건 언론이었다. 아무리 절규하고 발버둥쳐도 언론의 눈엔 보이지 않았다. 그들이 보인 건 수사가 본격화되고 시민들의 분노가 불붙은 뒤였다. "언론에서 처음부터 추적보도를 해줬으면 (상황이) 이렇게까진 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고 보도하지 않았다." (최승운 유가족연대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