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jongbae

저들은 몰라서 저러는 게 아니라 믿는 구석이 있어서 저러는 것입니다. 바로 상대 정당입니다. 새누리당이나 더민주 모두 상대 정당이 자기들 못잖게 공천 파동을 연출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에 안심하고 내전에 골몰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지고 볶는 것 때문에 지지층이 등 돌린다 한들 어디 가겠느냐는, 그래봤자 저쪽도 마찬가지인데 하는, 아주 현실적인 믿음에 기초해 막나가는 것입니다.
판단은 좀 천천히 내려도 될 듯합니다. 관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당과 연분 없는 사람들을 막무가내로 공천하고, 자기 스스로 자기 밥상 차리는 공천을 하는 이 행태가 컷오프 단계 때부터 부글부글 끓던 지지층의 분노를 폭발시킬지 여부, 이 분노가 투표 불참이나 다른 정당 기표로 이어질지 여부부터 살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하에 따라 '구원자 김종인'의 정치적 운명이 달라질 테니까요.
자르되 손에 피를 묻히기는 싫다! 유승민 의원에 대한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의 입장은 이런 것입니다. 제 목을 제 스스로 쳐달라는 주문입니다. 한꺼풀 벗긴 속살은 추합니다. 비겁합니다. 너를 베고 싶지만 나는 털끝 하나 다치고 싶지 않다는 '보신'의 얄팍한 기색이 역력합니다. 잘랐을 때 닥쳐올 역풍이 무섭고, 역풍이 불러올 정치적 손해가 부담스러워 손을 내미는 것입니다. 스스로 '배신자'라 규정한 사람에게 '장렬한 퇴장'을 요구하는 넌센스를 연출하는 것입니다.
공천관리위원장 '빽'이 후광효과를 발휘했을지 모른다는 얘기, 심지어 심사담당자가 과외교사가 됐다는 얘기는 흙수저 물고 태어난 절대 다수의 청년 가슴에 비수를 꽂아버립니다. '청년의 꿈과 어려움을 대변할 사람'을 뽑는 과정이 청년에게 염장 지르는 과정이 돼 버립니다. 이런 정당이 무슨 낯으로 청년을 상대로 투표 참여를 독려하고 한 표 달라고 호소한단 말입니까?
공천 결과를 놓고 당 안팎의 반발이 계속 되는데도 더민주 지도부는 일축합니다. 설득할 생각도 별로 없어 보입니다. 그저 "전체 선거구도상 정무적 판단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만 던지고 맙니다. 나머지는 알아서 해석하라는 투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머리를 굴려보지만 '아, 이거였구나'라는 깨달음은 나오지 않습니다. 뇌 회로가 '알파고' 수준이 못 돼서일까요? 뇌세포 가동률을 100%로 끌어올려봤자 그릴 수 있는 그림은 뻔합니다. 이른바 친노를 침으로써 한편으론 호남 굳히기에 들어가고, 다른 한편으론 중도 포획에 나선다는 그림입니다.
안철수 대표는 호남에서 말려버렸습니다. 스텝이 꼬여버렸습니다. 치고나가기는커녕 주저앉기 십상인 상황에 몰려버렸습니다. 호남층의 기반을 갖고 무당층을 견인하고 무당층의 지지를 갖고 호남층에 어필해야 하는데 지금 형편은 정반대입니다. 호남층의 실망감이 무당층의 회의감을 자극하고 무당층의 회의감이 호남층의 실망감을 키우고 있습니다. 상승의 도약대 위에 올라선게 아니라 상쇄의 늪에 갇혀버린 것입니다.
상황은 다시 원점, 여권에 안보 프레임의 위력을 재확인시키고, 안보장사의 의욕을 고취시킵니다. 더민주는 이번만이 아니라 늘 그래왔습니다. 가까운 과거만 놓고 봐도 그렇습니다. 2012년 대선 때의 국정원 댓글공작에 대한 규탄이 그랬고, 지난해의 국정원 해킹 프로그램 파문 대처가 그랬습니다. 끝을 보지 못한 채 돌아섰고, 그 뒤끝에서 여권은 다시 안보 프레임을 갈고 닦았습니다. 더민주의 필리버스터 회군은 새로운 시도를 위한 단절이 아니라 지켜우리만치 똑같은 반복입니다.
역풍을 우려한다는 말은 곧 리스크를 관리한다는 말입니다. 승리는 따 놓은 당상이니까 실수만 하지 않도록 조심한다는 뜻입니다. 짧게 말해 부자 몸조심 한다는 말이죠. 하지만 더민주는 부자가 아닙니다. 승리를 따 놓은 것도 아닙니다. 더민주의 지지율은 새누리당의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몇 달째 계속 되는 요지부동 현상입니다. 새누리당이 죽을 쒀도, 국민의당이 헛발질을 해도 더민주의 지지율은 마치 결박이라도 당한 듯 꼼짝 않습니다.
여권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야권이 일치단결된 모습으로 회기 마지막까지 필리버스터를 이어가는 것입니다. 스스로 연단에서 내려와 분란을 자초하는 게 아니라 분루를 삼키며 내려와 지지층의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일각에선 야권이 딜레마 상황에 빠져 있다고 진단합니다. 필리버스터를 이어가자니 선거구 획정안이 몸살 앓고, 선거구 획정안을 처리하자니 필리버스터가 고개 숙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동영 전 의원은 1년 전 새정치민주연합을 탈당하면서 자신이 정치적 생명을 걸고 추구해 왔던 진보적 가치들이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다고 주장하면서 이 점을 '중도우경화 환상' '새누리당 따라하기'의 증좌로 삼았습니다. 헌데 아무리 비교해 봐도 지금의 더민주와 국민의당이 표방하는 노선과 가치는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동영 전 의원이 대선 실패 후 이른바 담대한 진보를 주장하면서 몇 년 간 '낮은 곳'을 찾아다녔던 그 행적을 기준 삼아 국민의당 안철수 대표의 행적을 비교하면 둘의 노선은 달라도 상당히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