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min-sik

'오늘은 초급을 외웠으니 다음 주엔 중급 표현을 외워야지!' 이런 욕심은 버리자. 양적 팽창이 곧 질적 변환을 가져온다. 내가 외운 초급 표현의 양이 차고 넘치면 어느 순간 고급 표현이 나오는 것이지. 외워지지도 않는 긴 문장을 억지로 외운다고 고급 회화로 가는 게 아니다.
받아쓰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내 머릿속에 있는 국산 영어와의 결별을 위해서다. 우유 한 잔, 그러니까 glass of milk를 난 늘 '글래스 오브 밀크'라고 읽었다. 하지만 받아쓰기를 해 보면 원어민 발음은 '글래써 미역'처럼 들린다. "그랬어, 미역?" 파래도 아니고 미역한테 시비거는 거냐? 처음엔 난 이런 단순한 문장도 받아쓸 수 없었다. 경험을 통해 차츰차츰 영어에서 단어 끝에 오는 자음은 소리가 죽고, 자음 앞에 있는 L은 묵음이 된다는 걸 익혔다. 이건 문법으로 설명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글래써 미역'을 듣고 glass of milk를 찾아가는 과정. 이런 받아쓰기 공부는 결국 내 머릿속 국산 영어와 이별하고 원어민 영어를 만나러 가는 과정이다.
유치원생을 영어학원을 보내면, 아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는다. 한국어로도 의사소통이 힘든 아이인데 영어로 듣고 말하라니 얼마나 힘들겠는가. 다급하면 입에서 절로 한국어가 나온다. 그러면 혼만 나고 벌점을 받는다. 아이가 모국어를 한다고 혼내는 나라다. 아이가 학원에서 스트레스 받으면, 학원 다니기 싫다고 떼쓴다. 실력도 느는 것 같지 않다. 엄마가 그걸 보고 또 스트레스 받는다. '옆집 아이는 주재원 아빠 따라 외국 몇 년 다녀오더니 발음이 혀위에 빠다 구르는 듯 하더만. 우리집 웬수는 영어 학원 보내는 것 갖고도 비싸다고 난리니...' 결국 아이의 영어 스트레스는 엄마 아빠의 싸움에 불을 붙인다. 결국 아빠도 폭발한다. '알았어, 돈 대 줄테니까 나가. 애 데리고 미국 가면 되잖아.' 이렇게 또 이산 가족이 탄생한다.
사람들은 내가 MBC PD가 된 게 영어를 잘해서라고 생각한다. 그건 아니다. 영어랑 담 쌓고 살다가 피디가 된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나도 사실 영어보다 국어 실력 덕에 피디가 되었다. 나는 영어보다 한국어를 훨씬 더 잘한다. (진짜다. ^^) 영어는 MBC 입사 1차 필기시험 과목 국어 영어 상식 셋 중 하나일 뿐이다. 1차를 통과하느냐 마느냐가 중요하지 1차 시험 성적은 이후 전형에 별 영향이 없다. 2차 면접과 3차 합숙 평가는 오로지 말하기와 글쓰기로 결판이 난다.
영어는 20대에 혼자 독학해도 충분히 잘할 수 있다. 그런데 왜 다들 외국어는 조기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할까? 거기에 돈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본주의 사회다. 돈이 되는 일이라면 누구나 목청을 높여 떠든다. 영어 조기 교육에는 돈이 많이 든다. 그걸로 돈 버는 사람도 많다. 기본적으로 사교육은 부모의 불안을 키우고 그걸로 먹고 사는 시장이다. 영어 공부 안 시키면 자식의 미래에 큰일 날 것 같지만, 영어 공부 안 시키면 망하는 건 사교육 시장뿐이다.
매일 매일 새로운 상황을 외우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건 기존에 외운 내용을 다시 복습하는 것이다. 틈만 나면 혼자서 중얼중얼 회화 상황을 불러내서 암송해야 한다. 밥 먹고 쉬는 시간에, 일하다 쉬는 시간에, 메모장을 보며 한 단원씩 굴려본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가서 그날 외운 단원을 확인해본다. 다 외웠으면 전날까지 외운 것을 1과부터 다시 암송해본다. 이 학습법의 진가는 복리의 마법마냥 매일 매일 조금씩 이자가 붙듯 실력이 늘어나다 궁극에는 책 한 권을 통째로 외우는 고수가 되는 데 있다.
기초 회화 책 한 권을 통째 외우면 언제 어디서든 영어로 말문이 트인다. 기초 회화는 수준이 낮은 문장이 아니라, 가장 사용빈도가 높은 문장들이다. 자기 소개, 인사말, 날씨 묻기 등등. 이걸 공부하고 외우는 게 쪽팔린다고 다들 대학교 때 VOCA 22000 들고 다니고, Time지 영문 사설 읽고 그런다. 다 소용없다. 기초회화 책 한 권 외우는 게 최고다. 책 한 권을 머리에 집어넣어두니까 회화 할 때 막힐 일이 별로 없더라. 그리고 토익이나 토플은 따로 공부하지 않아도 절로 고득점을 받았다.
삶은 언제 바뀌는가? 새로운 지식이 생겼을 때? 새로운 기술을 익혔을 때? 삶이 가장 크게 바뀌는 순간은 삶의 태도가 바뀔 때다. 영어를 독학으로 정복한 후, 자신감이 생겼다. 세상 무슨 일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그런 자신감이 나를 조금씩 더 밝고 긍정적이고 낙천적으로 바꾸어놓았고, 그런 태도 덕분에 연애가 쉬워졌다. 무엇보다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그 마음, 나를 좋아하는 마음이, 연애의 시작이더라.
뉴욕까지 왔으니 자유의 여신상은 봐야지, 싶다면, 그대가 가지고 있는 전철표로 공짜로 탈 수 있는 페리가 있다는 것도 알아두면 좋겠지. 바로 스태튼 아일랜드 페리다. 배터리 파크 바로 옆에 선착장이 있다. 맨해튼에 있으면 정작 맨해튼의 고층빌딩들이 그리는 스카이라인을 볼 수 없다. 이렇게 배를 타고 한번 바다로 나와봐야 전경이 보인다. 인생이 힘들 때도 마찬가지다. 바쁜 일상속에 푹 빠져있으면 답이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그럴 때 여행을 떠나 평소 빠져있던 인간관계나 일상의 반복에서 거리를 두고 다시 살펴보면 답이 떠오르기도 한다. 안 떠올라도 할 수 없다. 그 핑계로 여행을 즐기면 되니까. ^^
방송을 만드는 게 삶의 낙이었던 내게, 회사는 더 이상 일을 주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지금 내가 괴로운 것은 나의 나라 사랑, 회사 사랑이 지나친 탓이구나. PD라는 일에 대한 애정이 너무 컸기 때문이구나." 회사에서 일을 시키지 않는 것이 내게 괴로움이 되는 이유는,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이 너무 큰 탓이다. 일에 대한 열정이 사라지면, 괴로울 일이 없다. 오히려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이용하여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여행을 다니며 자기계발에 힘쓰면 될 일을. 그래서 다시 마음먹었다. '나는 PD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