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yuna

결국 역사적 상상력의 문제이다. 기록의 뼈대 위에 어떻게 믿음직하고 생생한 허구를 덧씌우는가. 〈군함도〉는 너무 나갔고 〈택시운전사〉는 지나치게 무난한 길을 택했으며 〈박열〉은 그런 것을 꺼낼 여유도 없이 실화에 끌려다닌다. 결국 자신이 다루는 이야기를 주도적으로 통제한 영화는 단 한 편도 없었던 셈이다. 이 정도면 날 잡아 역사적 상상력의 가능성과 한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때가 된 게 아닐까.
완벽한 성비의 균형에 도달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를 향해 열린 길이 보이기 때문에 그렇다. 발전의 과정은 그 결과물보다 더 즐겁다. 나라 밖의 변화를 즐기다 보니 내가 '알탕 영화'들을 무한 생산하는 한국이라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된 여성 캐릭터가 너무 적어서 그냥 무난한 명예 남성 역으로 나와 비중을 챙겨도 다들 눈물을 흘리며 감지덕지하며 고마워하는 상황이라는 걸 잊고 있었다. 도대체 언제나 되어야 이 어이없는 시차가 극복될 수 있을까?
〈트랜스포머: 최후의 기사〉는 우리가 이상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은 세계를 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시끄럽고 장황한 증거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 영화는 오로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자신의 악담 능력의 한계를 실험해보고 싶은 평론가들에게나 의미가 있다. 완성된 영화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조악하고 지루해 빠졌는데 150분이나 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멀티플렉스관 절반을 점유하고 있고 사람들은 형편없는 입소문에도 그 영화를 보러 가고 돈도 꽤 벌어들인다. 어떻게 이런 영화가 존재할 수 있었을까?
결국 〈원더우먼〉이 나왔는데, 결과는 단순 명쾌하면서도 놀랍다. 선정성이 완전히 없어졌다고는 말을 할 수 없다.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은 잘생긴 배우의 몸은 그 자체로 선정적이다. 하지만 영화는 이런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그 선정성을 과장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익숙한 옷을 입은 원더우먼은 끊임없이 달리고 점프하고 탱크를 박살내고 총알을 막고 올가미를 던지고 적군을 두들겨 패며 카메라는 육체 자체보다 그 육체를 통한 액션에 집중한다. 액션이 나오지 않을 때는 최대한 복장을 숨기고 있기 때문에 원더우먼 복장은 늘 액션과 연결된다.
지금 영화관은 거꾸로 가는 것 같다. 최상의 상영 조건보다는 관리와 운영의 편의가 더 중요해졌고 모든 게 점점 유원지스러워지고 있다. 심지어 요새는 뻔뻔스럽게 떡볶이를 파는 체인점까지 생겼는데, 정말로 그걸 사들고 오는 관객이 내 옆자리에 앉을까봐 벌써부터 두렵다. 영화제를 가는 것도 이전만큼 즐겁지 않은데, 상영관의 전반적인 질적 하락 속에서 영화에 맞는 상영관을 선택하는 것은 거의 복권 당첨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왜 저 남자는 처음 만난 여자에게 반말을 하며 으스대지? 왜 저 여자는 별로 나이가 많지도 않은 저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지?"라는 질문이 먼저 떠오르는 건 심각한 문제다. 어떻게 되었는지 알 것 같다. 이 영화를 기획하고 제작하고 각본을 쓰고 감독한 사람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게 문제가 된다는 걸 몰랐을 것이다. 텔레비전만 틀어도 툭하면 처음 보는 여자들에게 반말을 해대는 무례한 남자들과 그들을 아저씨라고 부르는 맥 빠진 여자들이 부글거리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게 정상이 되는 건 아니다. 비정상인 언어가 많을 뿐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애플렉은 2010년 같이 일했던 동료 여성영화인들로부터 성추행을 이유로 고소당했다. 이 사건은 합의로 종결되긴 했지만 여전히 불쾌하며 이 사건을 알게 된 뒤로는 자연인 애플렉의 얼굴은 아무런 생각없이 그냥 보기는 어렵다. 허구의 이야기를 다루는 영상 매체에서 매력적이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점은 우리가 영화나 시리즈에서 매료되고 감정이입한 사람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고, 캐릭터와 분리된 본체가 따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하고 몰입한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에 무시할 수 없는 결함이 있다면 우린 어떻게 해야 할까?
존이 요새 우디 앨런 영화 속 주인공이었다면 끝까지 자기연민과 자기기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매기스 플랜〉에서 그는 이 악순환에서 빠져나갈 기회와 마주친다. 우디 앨런 영화와 〈매기스 플랜〉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건 이 영화가 존에게 감정이입할 생각은 티끌만큼도 없는 여성 작가/감독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영화는 존이 자신에게서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그 연구 결과를 존에게 통보한다. 그리고 존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이 영화의 선의는 굉장히 한국적이면서도 위험한 종류이다. 한국적인 건 당사자의 의사와 무관한 타인의 오지랖에 바탕을 두고 있어서이고, 위험한 건 미리 정답을 주고 여기에 대한 의심과 질문을 차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판타지지만 이 익숙한 자칭 '선의'는 아니다. 이 영화의 뽀샤시한 예쁨에도 불구하고 러닝타임 내내 미심쩍은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던 것도 당연하다.
연말이 되면 한국갤럽에서는 올해를 빛낸 영화배우를 발표한다. 여자는 9위에 오른 전지현 한명이다. 이 리스트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게 정답이다. 기사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좀 진지하게 반응하려 해봤다. 〈비밀은 없다〉 〈덕혜옹주〉의 손예진이 빠져 있는 2016년 배우 리스트가 과연 정상인가? 〈아가씨〉의 배우 중 유일하게 순위에 오른 사람이 하정우라는 게 말이 되나? 하지만 9위에 전지현이 오른 걸 보고 조용히 포기해버렸다. 전지현은 지금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맹활약하고 있긴 하지만 올해는 영화 작품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