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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은 나눌 수 있는가'를 쓰며 읽은 책들
한국 민주주의가 더 성숙한 민주주의로 도약할 전기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그'는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 '우울증 환자', '내성적이고 외로웠던 사람', '개인을 소모시키는 한국형 연예산업과 여론으로 둔갑한 악플의 피해자' 같은 '뻔한' 존재로 환원된다. 불충분하다. 미시적·거시적 조망을 총동원해도 '그 자살'의 의미는 언제나 그 이상이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것은 그 질문이 합당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그 질문이 중요하지 않아서도 아니다. 단지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사색하고 있기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은 과업이기 때문이다.
세계 최고의 R&D 재원 투입에도 불구하고 왜 성장률은 하락하고 있는 것일까? 갑질은 사회만이 아니라 기업문화에 그대로 축적되어 있다. 층층시하의 권위주의적 기업문화 속에서는 논박, 즉 잘못되었거나 변하는 시대에 부응 못할 것들에 대한 체계적 폐기를 감행하기 어렵고 그에 따라 산파술, 즉 창의적 아이디어의 산출과 시행이 곳곳의 암초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다 그렇게 구명 쪼끼를, 학생들은 입었다고 하는데 그렇게 발견하기가 힘듭니까?' 이 질문을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엄밀히 분석할 때, 중대본 방문시 박근혜가 조난당한 학생들이 선체에 갇혔다는 것에 대해서 전혀 인지하지 못했다는 탄핵심판 국회측 대리인단의 학설이 가장 합당하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이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장시간 동안 대통령이 제대로 된 상황보고도 받지 않았을 뿐 아니라 TV 뉴스도 보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지난 3월 15일에 있었던 재독 철학자 한병철의 강연을 두고 긴말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경제가 보도한 내용과 이날 행사에 참석한 블로거의 글을 바탕으로 문학과지성사에 사실관계를 확인한 바에 따르면 한병철 씨가 이날 강연에서
걷기는 생각하기와 연결된 행위다. 그래서 유명한 철학자들이 쉴새 없이 걸었다. 플라톤, 몽테뉴, 니체, 루소, 칸트 등이 그들이다. 매일 걸어 다니지만, 우리는 미처 그것이 생각하기, 더 나아가서 철학과 연결되는지 깨닫지
마르쿠제가 지적하듯이, 이렇게 우리의 관점이 변질되고 단순화되면, 우리의 비판적인 사고도 퇴화될 수 밖에 없다. 그저 과학기술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혜택을 편하게 누리기만 하면 된다. 과연 이런 상황이 우리가 그토록 바랐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