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레이스키 농장의 감자맛

까레이스키 농장이 시흥 땅에 정착한 사연은 뭘까? 이 아르카지 목사는 1990년대에 처음 한국에 왔다. 그 뒤 그는 14년간 우즈벡의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불법 체류자 신분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그의 아내 장료자 목사는 14년간 홀로 아들 3형제를 키우며 남편을 기다렸다. 그는 아내를 설득했다. 한국에 가서 농장을 일구자고. 그들은 러시아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한 뒤 불모의 땅에 푸른 농장을 일궈낸 '기적 일꾼들'의 후손이다. 아내는 반대했지만, 결국 남편의 뜻을 따라 한국에 왔다.

2015-07-28     정경아
ⓒShutterstock / Brent Hofacker

바로 며칠 전 그 농장을 방문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귀환한 '고려인' 3세와 4세들이 함께 모여 사는 고려인 농장. 전주 이씨 성을 가진 아르카지 목사와 부인 장 료자 목사가 이끌고 있다. 방문자들은 북한이탈 여성과 중국 동포여성을 포함해 9명. 지하철 4호선 정왕역에 내려 택시를 탔지만 네비게이션에 뜨지 않는 농장 위치 때문에 택시 기사가 애를 먹었다.

곧장 상이 차려졌다. 농장에서 기른 땅딸이 우즈벡 오이와 양파 무침, 우즈벡 스타일 배추김치까지 곁들였다. 배추김치는 잘게 썰어 겉절이처럼 담는 게 특징. 고춧가루를 적게 써서 보통 김치보다 덜 빨갛다. 빵과 밥이 함께 올라왔다. 잡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는 샤슬릭, 손으로 빚은 만띠의 맛에 반해버린 손님들, 우즈벡 레시피에 열광했다.

발이 부르트도록 돌아다닌 끝에 시흥 외딴 곳, 남의 눈에 아무 쓸모없는 땅을 사용하도록 허가받았다. 물이 한번 고이면 좀체 빠지지 않는 땅, 농지로 사용할 수 있다고는 아무도 생각지 못한 땅이었다. 그러나 하나 둘 모여든 우즈벡 고려인들은 해냈다. 물을 빼내고 오이, 고추, 참외, 토마토를 심었다. 다른 농지들과 1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는 덕분에 유기농법이 가능했다고 이 아르카지 목사는 말했다.

이목사의 미니 강론이 시작됐다. '사랑'에 대해서다. "내가 뭔가를 남에게 줄 때 그가 내게 되갚기를 기대하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되갚기는커녕 그가 내게 무슨 짓을 하든지 내가 그를 사랑하기를 그치지 않아야만 사랑이다. 그렇게 밑도 끝도 없는 사랑, 미친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다. 예수의 사랑이 그랬듯이."

조선의 국경을 벗어나 1860년대부터 러시아 접경 지대나 블라디보스톡 등 연해주에 살았던 까레이스키들의 역사는 150년이다. 연해주에서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등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스탈린의 강제 이주령이 발동된 것은 1937년. 고려인들도 다른 소수민족집단들처럼 강제 이주 열차를 탔다. 혹독한 기후 조건과 식량 부족으로 이주 과정에서 거의 1/10이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려인들은 살아남았다. 사막에 농장을 이뤄내는 기술력과 부지런함, 그리고 협업의 핵심인 공동체 정신 덕분이었다. 그만큼 까레이스키라 불리는 고려인들은 우수한 소수민족 집단으로 인정받아왔다.

이 아르카지 목사 세대인 카레이스키 3세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세대의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까레이스키 4세에 이르면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은 묽어질 수밖에 없다. 까레이스키 4세대들이 '조국'에 대한 관심보다 현재의 삶에 집중하는 건 자연스럽다. 이 아르카지 목사의 아들 3형제도 우즈베키스탄의 삶을 선택했다.

이 아르카지 목사부부의 꿈은 어느 산골짜기의 폐교와 인접한 농지를 사용할 허가권을 얻어 200명 가량의 까레이스키들이 정착하는 것이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을 포함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모든 까레이스키들이 함께 일하고 살아가는 공동체의 꿈. 가진 게 없어도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없어 보인다. 150년간 키워온 자신감이라는 재산이 있기 때문이다. 까레이스키들의 꿈이 이뤄지기를 불교신자인 나는 예수님과 부처님께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