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미애 "n번방 해결하지 않으면 한국사회는 지속가능하지 않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인터뷰

2020-05-01     박수진

“심장이 쿵쾅거렸다. 그리고 너무나 부끄러웠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지난 3월 지역의 한 교도소를 방문하러 내려가는 차 안에서 바쁜 일정 탓에 며칠 동안 들고만 다니던 프로젝트 ‘리셋’의 n번방 보고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이 3일 오전 제주시 봉개동 제주4·3평화공원에서 진행된 제72주년 제주4·3희생자 추념식을 지켜보고 있다.2020.4.3 ⓒ뉴스1

지난해 11월 <한겨레>의 보도로 엔번방 실태가 알려진 뒤 익명의 젊은 여성들이 모여 결성한 리셋은 올해 초 ‘텔레그램 디지털 성범죄 해결’을 국민청원 1호 법안으로 끌어올리며 160쪽 자료집을 국회에 제출한 바 있다.

“디지털 성범죄의 개념과 실태부터 대책, 해외 사례까지 망라돼 있었다. 이건 민간이 아니라 사법정의를 세우는 기관에서 했어야 할 일 아닌가.” 바로 그날 밤 회의가 소집됐다. 다음날 “미온적 형사처벌과 대응으로 피해자들의 아픔을 보듬지 못했다”는 법무부의 ‘이례적’ 사과와 중대범죄의 법정형을 상향하는 법 개정을 추진하겠다는 발표가 이어졌다.

 

―디지털 성범죄 특별법 요구가 여성계에서 있다. 실제 진척시킬 의지가 있나?

“형태가 특별법이 될지는 더 검토해봐야 하지만, 통합법의 필요성은 강하게 느낀다. 법무부의 우선과제다.”

―성폭력, 성매매 같은 기존 범죄에 대한 법 개정도 병행해야 한다는 지적이 높다. 특히 강간죄 기준을 ‘동의’ 여부로 바꾸자는 이야기가 꾸준히 나왔는데, 어떤 입장인가?

“비동의 간음죄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피해자의 심리상태가 과연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냐는 부분을 놓고 우려가 있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교육이 제대로 되면 비동의 간음죄가 도입돼도 과잉처벌 우려가 없다고 본다. 오히려 이런 방향으로 교육제도를 바꾸기 위해서라도 이 부분은 신설돼야 한다고 본다.

물론 제 생각이 법으로 표현되려면 (사회적)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예열단계라고 할까, 비동의 간음죄를 입법예고해놓고 사회적인 경고를 주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

―처벌 강화와 함께 포괄적 성교육 강화를 정부가 선언했지만 구체적이지 않다.

“엔번방 사건의 근본엔 한마디로 교육 부재가 있다. 경쟁만 가르치는 폭력사회인 거다.

얼마 전 읽은 김누리 중앙대 교수의 책에서 한국 사회의 심리구조를 ‘오만’과 ‘모멸’로 요약했던데 정말 공감했다. 오만함은 상대방의 감정에 대한 배려가 없는 거다. 모멸감은 열패감 때문에 느끼는데 이 열패감을 가장 약자에게 푼다. 경쟁에서 이기지 못했을 때, 그 열패감의 대상이 특히 나보다 약하다고 생각한 여성이라면 용납을 못 하는 거고, 여성 혐오도 생기는 거다.

그동안은 ‘잘못하면 처벌받을 거야’ 같은 겁주는 식의 ‘법 교육’만 했다. 그런데 엔번방 사건은 우리가 ‘스카이캐슬’처럼 성공하는 것만 가르치지 정작 상호 존중하며 관계를 형성하는 법은 안 가르쳐준다는 점을 똑똑히 보여줬다.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이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선 지속가능하지 않다. 엔번방 사건을 단순히 여성의 문제로만 국한하지 않고 한국 사회의 심각한 병리적인 징후로 봐야 한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 29일 오전 과천 법무부 청사 ⓒ한겨레/김봉규 선임기자

―디지털 성범죄 피의자 신상공개 강화를 밝혔는데, 포토라인을 없애고 피의사실 공표를 막겠다던 법무부의 기존 방침과 모순되진 않나?

“실제 수사하는 여성아동범죄조사부 부장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가해자들은 자신의 얼굴과 직업 등이 알려지는 걸 가장 수치스럽고 두려워한다고 한다.

기본적으로 범죄의 원인을 찾아내고 이후 대책을 마련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장기적인 과제다. 성범죄도 사건 하나하나가 ‘인권 참사’라는 점을 고려하면 엄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그 수단 중 하나로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건 (지금 단계에서) 필요하다고 본다.”

―사실 조주빈 검거가 없었다면 이번 총선에서 젠더 이슈는 실종됐을 거다. 그 전에는 주요정당의 젠더 관련 공약도 변변히 없었다. 강남역 사건, 미투, 혜화역 시위를 거쳤는데도 최근 오거돈 전 부산시장 사건을 보면 우리 사회가 좀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구조적인 이유가 있을까? 당대표 시절 안희정 전 지사 사건에 신속하고 단호한 결정을 내렸는데 내부 반발은 없었나.

“기성세대도 똑같이 산업화 시대의 경쟁 1세대다. 밥상머리에서 형제들에 비해 빨리 밥먹고 숟가락 놓는 사람이 최고라고 배웠듯, 경쟁 사회에서 본능적인 식욕, 성욕 등 내 욕구만 먼저 충족해야 한다며 자라났다. 아까 오만과 모멸을 말했는데 상대방이 모멸감을 느끼는지 생각이 없던 거다. 시장은 그 권력을 이용한 오만의 상징인 셈이고.

안 전 지사 땐 피해자 인터뷰를 보고 직감했다. 피해자 말이 맞구나. 그렇다면 이건 심각하고 있을수 없는 일이다. 피해자 인터뷰 방송이 끝나자마자 회의를 소집했다. 반창고를 붙였다가 확 잡아 떼면 악 소리를 못내잖나. 그래서 전격처분이 가능했다.”

―정치인 시절 ‘여성’ 정치인으로 분류되는 걸 꺼려 했다고 알려졌다. 그래도 여성의 롤모델이 돼야 한다는 주변의 시선이나 그로 인한 부담감은 있었을 듯하다.

“막중한 책임감이 있다. 동시에 여성이라서 여성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 오히려 과잉된 것처럼 보일까 하는 우려도 있다. 판사 시절 여성이란 이유로 형사 단독판사부를 맡기지 않으려고 하길래 법원장실까지 가서 ‘왜 제가 해선 안 되냐’고 물으니 ‘피고인이 법대에 덤벼들면 감당할 수 있겠냐’ 하더라. 그래서 ‘남자 판사들이 태권도 유단자가 아닌 이상 똑같은 상황인데 왜 내게만 묻냐’고 해서(웃음) 결국 단독판사를 맡은 적이 있다. 역시 여성은 형사 사건을 담당할 능력이 안 돼라는 말이 나올까 억척스럽게 일했다.

지금 검찰 조직도 의식적으로 바꿔보려고 한다. 중요 부서에 여성 검사들을 배치시키려 했고, 기피 부서로 알려진 여성아동범죄조사부에서 열정적으로 일을 한 분들에 대한 인사평가도 제대로 하려 한다. 동기부여를 하면서 홀대받았던 부서가 희망 부서가 되도록 바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