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무실엔 패션 파시스트가 있다

그러던 어느 날벼락 같은 계시를 받았다. 지난달부터 우리 사무실의 한 동료가 평소 좋아하던 AC/DC(호주 출신의 록 밴드)의 반소매 티셔츠를 입고 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뿐이라면 괜찮을 텐데 하루는 그날따라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에 긴 양말을 신고 슬리퍼로 온종일 사무실을 누볐다. 그때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저건 좀 아니지 않나?'라고 중얼거렸다.

2015-07-03     박세회
ⓒ허핑턴포스트코리아

결론부터 말하겠다. 허핑턴의 뉴스룸엔 '패션 파시스트'가 있다. 처음에는 마치 일반인인 것처럼 조용히 숨어 지냈던 것 같지만 내가 조직에 들어가자 본색을 드러냈다. 왜냐하면, 난 항상 패션 테러리스트니까. 우연히 결정적인 단서를 잡은 건 지난달이었다.

'흠, 운동하려고 산 거지만 나쁘지 않은데? 역시 여름은 하늘색과 주황색의 계절이지."라고.

그런데 그 파시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나 보다. 같이 담배를 피우러 가서는 내 신발을 물끄러미 보더니 "신발 좀 예쁜 걸로 사지!"라고 소리를 쳤다. 아니, 내 신발이 뭐가 어때서? 그래서 그 파시스트의 신발을 봤더니 하얀 실내화를 신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발끈했다. "선배가 신고 있는 건 고등학교 때나 신던 실내화 아녜요? 패션에 신경 좀 쓰세요!"라고 빽 소리를 지르고 돌아섰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며 좀 전의 상황을 곱씹어보니 더 화가 났다.

몰래 찍은 패션 파시스트의 신발과 나의 뉴발란스.

그래서 나는 그 파시스트의 정체를 확실하게 파헤치기로 했다. 자기 입으로 패션 파시스트라는 걸 시인하게 하기 위해 며칠을 연속으로 프린트 셔츠만 입고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좋아하는 일본밴드 스피츠의 로고가 새겨진 감색 셔츠, 루이 CK의 얼굴이 찍혀있는 남색 셔츠, 똘똘이 스머프가 복부 전체에 그려져 있는 네이비 블루 셔츠, 커다란 고양이가 수 놓여 있는 짙은 청색 티셔츠를 번갈아 일주일 정도 입고 가자 드디어 파시스트는 더는 자신을 숨기지 못하고 또다시 감정을 드러냈다.

옳다구나. 걸렸다! 이 패션 극단주의자. 아마 다른 모든 사람은 몰라도 이 글을 보는 그 사람은 자기라는 걸 반드시 알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 일이 공론화된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해 우리 남현지 에디터가 권력에 굴하지 않고 증언해 줄 거라 믿는다. 이제 이 패션 파시스트의 정체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건 시간 문제다.

이라는 TV 프로그램에선 정말이지 정나미가 뚝 떨어지는 기획을 했었다.

패션 파시스트들은 우리 패션 테러리스트들을 매우 괴롭게 한다. 현재 나는 아침에 어제 입었던 티셔츠를 입어선 안 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며 매일 티셔츠를 골라 입어야 하는 고통을 하루하루 참아내고 있다. 이런 압제 속에 계속 살 순 없었다.

패션 테러리스트들의 도원 결의.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들어 입을 손으로 막아야 했다. 패션 파시스트의 압제에 시달리는 동안 나도 어느새 다른 이의 옷차림을 비난하는 패션 파시스트가 되어있었다.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그의 복장을 훑어보며 저건 저 사람의 취향이니 존중해줘야 한다며 나 자신을 달랬다. 스머프 티셔츠를 입고 AC/DC 티셔츠를 입은 사람을 가여워했다. 인생은 가끔 뜻하지 않은 방향에서 교훈을 던져주곤 한다. 아, 패션 테러리스트인 나도 누군가에겐 패션 파시스트가 될 수 있구나. 파시스트와 테러리스트는 종이 한 장 차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