혐오세력 덕에 더욱 '핫'해진 퀴어문화축제

2015-06-26     박세회
ⓒ한겨레

'하필 그분이 지금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를 아는가?'

개신교 네트워크를 타고 퍼진 카톡 메시지에 따르면, 서울광장에서 열리는 퀴어문화축제를 막기 위해서다. 무엇 하나 허투루 하시는 일이 없는 그분의 뜻을 저토록 도저하게 해석하는 이들의 다른 경고도 있었다. “메르스·에이즈 바이러스가 결합할 경우에 슈퍼바이러스가 돼 국가적 재앙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합니다.” 에이즈를 동성애자에 대한 심판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돌리는 문자였다.

기적 같은 ‘무지개 줄서기’ 집회 신고

지난 6월16일 법원이 마침내 집요한 방해에 마침표를 찍었다. “집회의 금지는 원칙적으로 공공의 안녕질서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명백하게 존재하는 경우에 한하여 허용될 수 있다.” 이날 서울행정법원은 퀴어문화축제조직위원회가 서울지방경찰청을 상대로 낸 옥외집회 금지통고 효력정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퍼레이드 금지를 금지한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끝났다고 생각할 때,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우기는’ 이들이 있다. 천상의 법을 따르는 그분들과 박원순 서울시장이 또 만났다. <국민일보>가 전하는 이영훈 한국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의 이날 발언은 이렇다. “앞으로 한국 교회 안에서 일어날 일에 대해 자제 능력이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퀴어에게 침묵은 죽음

‘2015 제16회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이 지난 6월9일 서울광장에서 열렸다. 이날 퀴어문화축제 조직위는 메르스 감염을 우려해 퀴어들에게 개막식 참가 대신 유튜브 중계 시청을 권했다. 그러나 메르스 위기를 들어 퍼레이드 취소를 요구하는 이들은 이날 반대 행사에 수천 명이 모였다.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제공

밤새 벌어진 저항은 7월까지 계속됐다. 6월이 퀴어의 명절이 된 유래다. 하필 그로부터 46년 뒤인 2015년 6월28일, 한국의 시민적 저항의 상징인 서울광장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열린다. 올해 축제의 슬로건은 ‘사랑하라, 저항하라. 퀴어레볼루션’이다.

“역대 최고, 최대의 이벤트.”

지난 6월9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개막식 행사장 주변에 개신교 신자들이 모여 부채춤을 추며 행사 반대를 외쳤지만, 퀴어문화축제는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다. 6월13일 이태원 클럽에서 열린 퀴어문화축제 파티에는 1300여 명이 모여 춤추고 노래했다. 이날의 콘셉트는 ‘프라이빗 비치’(Private Beach). 비치웨어·반바지 등을 입은 퀴어들이 클럽에 모여 ‘거하게’ 놀았다. 퀴어문화축제를 “음란하다”고 꼬투리 잡는 이들의 성적 보수주의에 “노출이 어때서?”라고 되돌려주는 파티였다.

퀴어영화제 ‘매진’… 핫해진 ‘인권’

서울시청 무지개 농성 때부터 성소수자 행사에 적극 함께한 조계종 노동위원회의 주최로 지난 6월17일 법회가 열렸다. 박승화 기자

등 매진작이 속출했다. 6월21일까지 서울 신사동 롯데시네마 브로드웨이 6관에서 열리는 퀴어영화제는 예년보다 뜨거운 열기 속에 진행되고 있다. 소셜펀치 모금도 목표액 900만원을 넘어섰다.

혐오에 맞선 반발로 ‘개념 게이’ 문화도 번졌다. 인권운동과 거리가 있던 이태원 클럽문화 기획자들이 퀴어문화축제 파티를 주도하고, 이른바 ‘게이스북’(게이들로 연결된 페이스북) 유명인들이 인권과 관련된 내용을 올리기 시작했다. 이종걸 성소수자차별반대 무지개행동(무지개행동) 집행위원은 “인권이 핫한 이슈가 됐다”고 말했다.

2015년은 혐오 반대가 본격화된 해다. 나영 무지개행동 활동가는 “여성 혐오에 대한 저항으로 ‘나는 페미니스트다’ 운동이 벌어졌고, 성소수자 혐오 반대로 퀴어 퍼레이드 참가 열기가 확산됐다”고 진단했다. 얻은 것도 없는데 너무 많이 얻었다고, 권리도 없는 과한 권리를 가졌다고 비난받는 이들이 저항에 나섰고, 이들을 지지하는 분위기도 확산됐다.

지난 6월17일, 대한불교조계종 노동위원회는 ‘성소수자 초청법회’를 열었다. 종단 차원으로는 최초였다. 이날 서울 종로구 조계종에서 열린 법회는 부처님 오신 날과 퀴어문화축제 개막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었다. 효록 스님은 법회에서 “부처님께서 2015년 지구라는 별, 한국이라는 문화에 계신다면 뭐라고 했을까”라며 “성소수자도 똑같이 존중받아야 할 사람이라고 말할 것 같다”고 말했다.

조계종 ‘성소수자 초청법회’ 열어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 참가를 촉구하는 1인시위에 고동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가 첫 주자로 나섰다. 퀴어문화축제 조직위원회 제공

앞서 5월9일 서울에서 ‘아시아 LGBT 컨퍼런스’가 열렸다. 필리핀·중국·싱가포르 활동가가 참여한 이날 토론회에서 지난 20년간 펼쳐진 동아시아 성소수자인권운동의 경험을 공유했다. 강명진 위원장은 “싱가포르에서 기독교와 이슬람이 함께 성소수자 반대운동을 벌였다고 들었다”며 “한국만큼 심하진 않지만 혐오의 확산은 공통된 현상”이라고 전했다. 1980~90년대 미국에서 실패한 기독교 보수주의 논리가 선교와 지원을 무기로 수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구촌 대세는 한반도를 비켜가지 않는다. 지난 6월9일 퀴어문화축제 개막식에서 17개국 주한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해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했다. 이날 개막식장 주변에서 반대 행사를 벌이던 이들 중 일부는 영문 유인물을 배포하며 대사관을 비판했다. 특히 미국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지지선언 참여는 의미심장했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를 성적으로 타락한 사회라고 주장하며 “동성애 확산을 막을 최후의 보루”를 자처하는 일부 개신교, 근본주의 신앙을 지키는 ‘지구방위대’를 자처하는 이들이 처한 냉정한 지구촌 현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