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핑턴포스트코리아 인터뷰] 알 마문 AMC 팩토리 활동가 "이주노동자는 가난하지만 불쌍한 존재는 아니다"

2015-06-19     원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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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한 '이주노동자'의 한국 정착기다.

- 당시 IMF 사태가 터지고 한국 경기가 좋지 않았을 텐데.

이주노동자로서 마문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3~4명이 사는 컨테이너에 살았다. 첫 직장은 옷을 만들고 난 원단 쪼가리를 주워 재활용 하는 곳이었다. 그는 힘들고 눈물이 나서 방글라데시에 있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너무 힘들어요. 나 방글라데시로 돌아갈래요. 비행기 표 끊어주세요."

그러자 사촌 형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네가 여기 700만 원 주고 한국을 왔는데 어디를 간다고 그래!" 사촌 형의 손에 이끌려 가구를 만드는 공장으로 옮겼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이주노동자들이 100여 명이 넘게 있었던 이곳. 3개월을 먹고 자면서 한국말을 배워가니 이제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2002년, 한 공장에서 퇴직할 때가 됐다. 퇴직금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회사는 주지 않았다. 이주노조가 나섰다. 주기를 망설였던 퇴직금을 받아내게 됐다. 그것이 인연이었다. 1년 뒤 마문은 이주노동자 강제추방에 맞서 명동성당 농성에도 참여했다. 21일간 단식농성도 했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난 것도 그때였다.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

마문이 민중가요 '철의 노동자'의 한 소절을 정확히 아는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 '이주노동자는 불쌍하다.' '가난하다.' 한국의 보편적 정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법이 이주노동자를 차별하고 있다"

- 한국에 처음 오던 그때와 인식이 바뀌었나

마문이 설명한 사례는 이랬다. 한 이주노동자가 공장에서 일한 지 10개월 가량 될 즈음이었다. "사장님, 저 허리가 아파서 일 못 나가겠어요." "안 돼!" 사장은 단호했다. 공장 안 기숙사에서 주말을 보내고 월요일 아침 공장 대신 고용노동부로 갔다. 그런데 별안간 사장은 '이탈신고'를 해버렸다.

우리나라 전체 이주노동자는 150~180만 명으로 추산된다. 이데일리는 "(이 가운데) '고용허가제'(중국, 네팔 등 15개국)나 '방문취업'(중국 등 동포) 비자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각각 20만 명, 26만 명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조선일보에 따르면 미등록 이주노동자는 20만 명 선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이런 노동자들이 합법과 불법의 사이를 오가고 있다. 그리고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이주노동자에 대한 폭행과 차별, 착취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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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이주노동자들의 권익 보호 등을 위해 이주노조에서 일했던 마문은 '영화'라는 분야에 새롭게 눈을 뜬다. 현재 '아시아 미디어 컬처 팩토리'(AMC팩토리) 사무국의 상근 활동가로 일하고 있는 그는 이주민의 문화예술 활동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마석 가구단지 공장에서 일하다 AMC 팩토리(당시 서울 서교동, 현재 영등포구 문래동)의 내부 인테리어를 한 것이 계기가 돼 여기에 합류하게 됐다.

13년간 공장에서 일한 그가 어떻게 문화라는 생소한 영역에 들어오게 된 걸까. 부인의 영향이 컸다. 2009년, 한국인 부인과 결혼과 동시에 귀화한 그는 가구공장에 계속 다녔다. 부인의 만류가 계속됐다. "돈은 안 벌어도 좋다. 다치지만 마라" 그래도 계속 공장에 나갔다. "오늘 나가면 나랑 못 살게 될 줄 알아라" 결국, 13년을 일했던 마문은 그 길로 일을 그만뒀다. 사장에게 전화가 올까 봐 전화기까지 꺼버렸다.

단편영화 '파키'(2013)를 첫 작품으로 영화제작을 시작했다. 서울독립영화제, 인디다큐 페스티벌 등에도 초청된 굿바이(2014)는 15년을 한국에서 살다 본국으로 돌아간 한 이주노동자의 삶을 다뤘다. 머신(2014)은 외국인이 바라본 한국인과 한국사회의 반복되는 일상적 모습을 영상화했다. 그의 주제와 문제의식은 다양하다.

- 영화는 어떤 매력이 있는가.

-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은?

-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가장 많이 바뀐 점은.

- 좋아하는 영화감독이 있나

- 자신이 만든 영화에 피드백을 받는 편인가.

마문이 출연한 고발뉴스 방송이다.

- 공장에서 노동자의 삶과 영화감독의 삶은 많이 다를 텐데. 어떤가.

- 당신과 얘기를 나눠보니 무척이나 삶에 만족하며 사는 것 같다. 행복지수 1위라는 방글라데시 출신이라 그런 걸까.

- 한국 사람들은 1등, 1위에 집착하는 편인데.

=모든 나라에 그런 게 있다. 발전된 나라 중에 1등 돼야 한다는 강박 같은 게 있다. 한국에서는 10억 원 정도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있는 거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10억 원을 넘게 가지고 있는 사람 얼마나 많은가. 또 없는 사람 아예 없다. 방글라데시도 마찬가지다. 내 아버지를 보면, 부자라고 볼 수는 없는 데 편하게 먹고 살았다. 내 영화가 상업적으로 성공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없다.

- 방글라데시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부모님이 보기엔 한국에서 고생한 아들이 안쓰러웠을 것 같다.

- 다문화가정에 대한 한국 내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편견을 극복할 수 있을까.

- 백인 위주의 미국사회에서 흑인들이 점차 영향력을 확대해나간 것처럼 말인가.

=맞다. 혜택을 줘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그건 장기적인 관점에서 옳지 않다. 가수 인순이 씨를 봐라. 그 분은 그런 편견을 뚫고 성공하지 않았나. 이 사회에 맞춰서 함께 가려면 공장을 벗어나 사회 다양한 곳에서 활동해야 한다.

마문이 있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전경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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