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서지현 검사가 올린 안태근 성추행 폭로 글

2018-01-30     김원철

8년 전 안태근 전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한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

안태근 전 검사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29일 폭로한 서지현(사법연수원 33기)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는 검사 생활 동안 남성 검사들에게 당한 또 다른 성폭력 경험들도 자세히 밝혔다. 서 검사는 지난 29일 ‘나는 소망합니다’는 글 마지막에 “(2010년 장례식장서 겪은 성추행) 같은 일로 매우 큰 심적인 고통을 당하던 중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소설 형식으로 작성한 개인적 글이다. 100% 실제 사실을 내용으로 쓴 것”이라고 설명한 뒤 자신이 경험한 성폭력 사례들을 첨부했다. 서 검사가 쓴 글의 전문을 그대로 옮겼다.

서지현 검사가 1월 29일 검찰 내부망에 올린 글

-내딛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잠 못 이루는 밤들을 보내고 어렵게 쓰는 글입니다.

-고백 1-

저는 임은정 부부장님의 게시판 글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저런 극단적인 과격한(?) 방법밖에 없나....’하는 생각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저는 그저 맡은 일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해 처리하면 내 할 일 다 하는 것이라고,

검찰 개혁은 나 따위 나서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히 이루어 질 것이라고,

그렇게 매우 안이하게 생각을 하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거대한 권력을 거머쥐고, 어떠한 짓도 서슴치 않는 그들

조금이라도 거슬리면 검사 하나 문제검사 만들거나, 심지어 옷을 벗게 하는 것까지도 손쉽게 해내면서

힘 없고 빽 없는 일개 검사의 절규 따윈 비웃으며 무시하는 그들

-고백 2-

공공연한 곳에서 갑자기 당한 일로 모욕감과 수치심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나, 당시만 해도 성추행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운 검찰 분위기, 성추행 사실이 언론에 보도될 경우 검찰조직의 이미지 실추, 피해자에게 가해질 2차 피해 등의 이유로 고민하던 중,

그 후 어떠한 사과나 연락도 받지 못하였으나,

그러나,

사무감사 지적을 이유로 검찰총장 경고를 받고,

검찰총장 경고를 이유로 통상적이지 않은 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납득하기 어려운 이 모든 일들이 벌어진 이유를 알기 위해 노력하던 중

인사발령의 배후에는 안태근 검찰국장이 있다는 것을,

너무나 부당하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말렸습니다.

지금 떠들었다가는 그들은 너를 더더욱 무능하고 문제 있고 이상한 검사로 만들어버릴 것이다.

저는 그저 제 무능을 탓하며 입 다물고 근무하는 외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냥 내가 성실히 근무를 하고, 열심히 맡은 사건을 처리하면 나의 진실성과 성실성을 알아줄 것이라고,

언론에 이야기를 해보라는 권유나 기자의 접촉도 있었으나, 조직을 위하겠다는 마음에 이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들은 답변은 ‘검사 생활 얼마나 더 하고 싶냐, 검사 생활 오래 하고 싶으면 조용히 상사 평가나 잘 받아라’ 하는 것뿐이었습니다.

저의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고 순진한 것이었는지,

-소망-

투명한 인사제도, 상벌 절차의 객관화

인사제도, 상벌절차가 투명해지지 않는 한,

제가 굳이 긴 말을 하지 않아도 모두 공감하실 것입니다.

‘그 썩어빠진 것들 그냥 그대로 살라고 냅둬라’라는 의견이 나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빽 젤 쎈 놈이 젤 좋은데 간다’는 인사제도

그래서 빽 없고 힘 없으면 간부 말 잘 들어서 평가라도 잘 받아야 하니, 간부의 그 어떤 갑질, 폭언, 부당한 지시에도 눈감고 입 다물게 하는 인사제도

가해자들은 당당히 잘 살아가고 피해자들만 박해를 받고 위축되어야 하는 성폭력 성추행 성희롱......

제가 너무 검찰에 오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묵묵히 내 일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평범하고 힘없는 일개 검사가 무엇을 바꿀 수 있나 체념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너무나 검찰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저도 그분들의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10년전 한 흑인 여성의 작은 외침이었던 Me Too 운동이 전 세상을 울리는 큰 경종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아무리 제 존재가 너무나 작고 미미하더라도,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미래의 범죄에 용기는 주어서는 안되겠다는 간절함으로 이렇게 힘겹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목소리 내어 이야기하는 검사도, 묵묵히 일만 하는 검사도, 또 소위 코어의 귀족검사도

하지만, 아무도 우리의 문제를 대신 해결해주지 않습니다.

나에게 일어난 불의와 부당을 참고 견디는 것이 조직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소망합니다.

저는 아직도 검찰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MeToo #검찰인사제도 #검찰내성폭력

서지현 검사가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소설 형식으로 작성한 개인적 글

#1

여자는 별안간 울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든다...아이에게서 온 전화다.

“집에 오면 뭐해요… 또 논술 학원 가야하는데…”

“왜 논술학원 가기 싫어?”

“그래. 바꾸는 건 나중에 의논해보고, 피곤하면 가지 않아도 돼”

여자는 핸드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한다. 벌써 5시가 넘었다.

화들짝 놀라 앞에 펼쳐져 있던 책을 덮으니 제목이 다시금 눈에 들어온다.

하아…나보다 10년이나 어려도 여전히 비슷비슷하게 살아가고 있구나…

불현듯 아이를 낳았을 때,

머리끝까지 치솟던 분노와 -도대체 신은 왜 여자에게 이렇게까지 끔찍한 고통을 주는 것일까, 도대체 왜 아무도 출산의 고통이 이토록 끔찍하다는 것을 알려주지 않은 것일까 하는- 내가 이토록 고통 받을 또 하나의 존재를 낳지 않은 것이 너무나 다행이라는 안도감의 기억이 슬며시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간다…

10년이 지나도, 그리고 또 10년이 지나도 이 세상은 변하긴 영영 글렀어.

아이가 집에 왔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마음이 급해진 여자는 황급히 앞에 놓인 책들을 주섬주섬 모아들고 의자에서 일어서다 핑그르르 현기증에 스르륵 주저앉는다…맞아. 나 조금 전 퇴원했지……

‘개새끼’

이전까지 썼던 제일 심한 욕이 ‘거지같은 놈’ 정도였던 여자였지만, 이제는 욕이라도 하지 않으면 이 모든 일들을 참아내기 어려워졌다.

다시 한번 욕을 뱉어내며 앞에 놓인 책들을 전보다는 조심스럽게 모아 들려니 조금 전 읽었던 책의 구절들이 툭툭 갈비뼈를 두드린다. 칫 결국 이 모든 게 그저 참고 침묵하기만 했던 내 잘못이라는 건가…

여자는 조용히 혼자서 입을 삐죽거렸다. 한동안 잊고 있던 한기에 몸이 파르르 떨려온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겠다는 발작성 현기증 때문인지, 병원에서 막 나와 너무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조금 전 읽었던 책의 내용 때문인지…여자는 알기 어렵다.

이 모든 게 다 그 새끼 때문이야…

‘쥐새끼 같은 놈. 언젠가 터질 줄 알았어’

한동안 자지 못하던 잠을 겨우 자기 시작한 게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금 날이 밝을 때까지 하얗게 밤을 지새우기 시작한 것도 그 무렵부터였다.

잊기 위해 그토록 노력했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다. 복수는 신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여자가 믿고 있던 신은 정의의 신이라고 했으니까……

헤아릴 수 없는 날들을 아무리 밀어내도 떠오르는 그놈의 그 눈빛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수시로 가슴이 조여오고, 누웠다가 발딱발딱 일어나고, 피가 발바닥에서부터 거꾸로 솟구쳐 올랐다.

어렵게 생긴 아이까지 유산됐다. 꽤 안정기에 들어섰다 했었는데…

‘죽어봤자 밝혀지는 것도 없는데..’라고 너무 가볍게 그들을 입에 올렸던 탓일까…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목숨을 던지는 방법밖에 없는 것일까....정말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것일까…

여자는 여전히 선함이 악함을 이길 것이라고, 최선을 다해 선하고자 했던 자신의 의지가 틀리지 않았었다고 너무나도 순진하게 믿고 싶었다.

그것은 여자에게 불의와 악에 저항하고 선을 수호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아무런 힘도 어떠한 빽도 없는 여자에게 오직 그렇게 믿는 외에는 달리 스스로를 위안할 방법도 상황을 해결할 묘책도 없어서였을 뿐이었다.

시신경유두부종이라고 했던가 처음 들어본 발음하기도 어려운 병이 의심된다며 어느 날 갑자기 시력을 완전히 잃을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 계속해서 귓가를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여자의 뇌에는 그 날 그 곳에서의 그놈의 행동들, 그놈의 숨결, 어쩌면 그 술 냄새까지 또렷이 더 또렷이 새겨질 뿐이었다.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기였지만 -부모님을 전부 잃은 여자는 미혼의 여동기가 부친상을 당한 것이 영 안쓰러웠다.

여자는 두고두고 그것을 후회했다.

10월...벌써부터 길가에는 쓸쓸한 나뭇잎들이 나뒹굴고, 아침 저녁으로 얇은 코트라도 걸쳐야 할 정도로 꽤 쌀쌀해지기 시작했는데, 야외콘서트라니 작은 연하늘색 무릎담요까지 준비한 터였다.

동기의 부친상이 영 마음 한켠에 걸렸던 여자는 ‘그럼 나는 장례식장에 갈테니, 당신은 강의를 들으러 가라’고 순순히 가던 길을 돌려 지하철에서 내렸다.

왜 그렇게 순순히 돌아섰는지, 왜 콘서트장을 간다고 나서면서 때마침 검은 옷을 입고 나섰었는지....

엄마 그리고 아빠.....그토록 그녀를 사랑해주었던 그들을 차례로 보낸 후, 여자는 한동안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었다.

가빠지려는 숨을 고르며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얼굴을 알만한 동기는 아무도 없었다.

아는 사람도 없는데, 조금만 앉아있다 조용히 일어나야지...

페이스북인지 트위터인지도 열심히 한다는 장관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었다. 장관은 언론에서 본 모습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수행검사가 장관 옆에 앉았다. 누군가 조용히 여자에게 그 옆에 앉으라며 여자의 팔꿈치를 밀었다...뭐지? 순간 당황한 여자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무리 중 여성은 여자 혼자 뿐이었다

이미 익숙해진 일이었다. 기수 문화가 그리도 엄격한 여자의 회사에서, 여성을 그리도 무시하는 여자의 회사에서, 기수와 상관없이 높은 양반 옆 중앙 좌석에 여성을 앉히는 일은 거의 언제나 있는 일이었다. 여자는 그때 수행검사가 술에 취한 상태였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놈이 자꾸 여자 쪽으로 몸을 기댔다.

옆에 있던 장관이 웃으며 말했다.

모두가 장관을 따라 허허허 웃었다. 콘서트장에 가려고 준비했던 무릎담요를 그놈과의 사이에 놓고 애써 그놈과의 거리를 조금이라도 더 벌리기 위해 식은 땀을 흘리고 있던 여자만 빼고.....

술을 전혀 마시지 못하는 여자는 회사에 들어온 이후부터 많은 술 취한 상사와 선배들을 마주 해왔다. 술에 취해 이 정도 기대는 것으로 불쾌감을 표현해서는 예민 떤다고 여자만 손가락질 당할 뿐이다....

언제나처럼 여자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다. 어찌 된 일인지 장관은 쉽게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동기가 장관과 꽤나 친밀한 관계였나보다.

무심히 내려다본 여자의 허리에 그놈의 손이 닿아 있었다.....

여자는 그놈과의 사이에 놓여있던 무릎담요의 부피를 좀 더 넓히며 옆으로 삐죽삐죽 그놈과의 거리를 넓히기 위해 움직였다.

분명 그놈의 손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움직였다. 어느새 그놈의 손이 그녀의 엉덩이를 더듬고 있었다...

내가 느끼는 것은 환상일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여자는 그것이 자신의 머릿속에서만 일어나고 있는 환상인 것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계속해서 하체 쪽에 느껴지는 그 스멀거림이 실제인지 환상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몸을 조금씩 비틀어 조금이라도 그 스멀거림을 피하고, 그놈의 그 손을 떼어놓기 위해 애쓰던 여자 주위의 모든 것이 언제부터인지 부옇게 보이며 느릿느릿 움직였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뇌를 비웃듯 또르르 또르르 떨리기 시작하던 여자의 심장이 견딜 수 없이 요동쳤다.

언제부터 그곳에 서있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있는 힘을 다해 눈을 크게 부릅뜨려 하면 할수록 거울 속 여자는 이를 악물며 눈을 더욱 더 세차게 내리 감았다.

분명 환각이었을 거야...여기는 장례식장이잖아...

‘아이’라는 소리에 거울 속 여자가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아이를 돌보아 줄 일가친척이 아무도 없는 여자에게 이모님들은 유일하게 여자가 회사에 다닐 수 있는 끈이었다.

‘친정엄마 없이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는 여자는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여자야’

하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아이만 바라보면 사르르 사르르 행복감이 여자의 목구멍을 간지럽혔다. 세상의 무게에 무너져 내리려 할 때면 아이에게 여자가 겪었던 엄마 없는 아픔을 겪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언제나 말아쥔 여자의 주먹에 불끈 불끈 힘을 넣어주었다.

서서히 떨림이 잦아들며 여자는 그곳에 두고나온 핸드백과 무릎담요를 떠올렸다. 양손을 힘껏 주고 눈을 애써 부릅뜨고 그제서야 화장실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다시금 떨려오는 가슴을 다잡으며 스르르 들어가 그까짓 크게 비싸지도 않은 핸드백과 무릎담요를 챙겨 나오던 여자 앞에 시커먼 그림자가 부딪혔다.

그제서야 그림자의 얼굴을 올려다본 여자 눈에 촛점이 반쯤 풀린 채 실실 거리며 여자 앞을 막아서고 있는 그놈의 얼굴이 들어왔다. 와락 풍겨오는 역겨운 술냄새에 그제서야 부옇던 여자의 눈이 여자를 흘겨보다 꾸욱 내리 감으며 코웃음 치듯 중얼거렸다

#3

그냥 ‘엉덩이를 만졌다’고 말한 여자에게 남편이 큰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은 채 ‘고소 같은 것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물었을 때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한 것은 여자였다.

누구도 대놓고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상대 여성은 어느새 함께 일하기 불편하고 예민한 여성으로 사람들의 수군거림을 당하는 것을 봐왔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도 여자는 자꾸만 남편이 원망스러웠다.

치마 속으로 손이 들어온 것만 아니라면 여성의 엉덩이와 허리를 껴안고 더듬는 것은 그렇게 치욕스럽고 끔찍한 일은 아닌 것일까....

수도 없는 ‘만약에’가 여자의 가슴을 내리찍었다.

만약에 강의에 가고 싶다는 남편의 말을 무시하고 계획대로 콘서트장에 갔더라면...

그리고 만약에....아빠가 살아있었다면.......

만약에 아빠가 살아있었다면....만약에 아빠가 살아 있었다면 .....

아니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다.

그렇다. 이 모든 게 아빠 때문이었다.

그 어떠한 불의도 참아내지 말라고, 그 어떠한 부당함에도 입 다물지 말라고, 욕설을 하고 소리를 질러대며 절대로 세상과 타협하지 말고 네 멋대로 그렇게 살아가라고 그렇게 가르쳐줬어야 했다.....

5살 6. 25. 동란에 아버지를 잃고, 3살 동생을 등에 들쳐 업은 채 부르튼 발로 먼 길을 걸어 피난을 갔다는 여자의 엄마는 말수가 별로 없었다.

한번씩 들이닥쳐 폭풍우를 일으키는 할머니나 고모 앞에서도 엄마는 언제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석을 멍하니 응시한 채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이 땅에서 여자를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는 참고 또 참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원망을 하던 여자는 다시금 머리를 세차게 내저었다.

그놈이 그 후 회사의 빅2라는 국장 자리까지 꿰차고 수년간 절대 권력을 누려왔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힘을 가지신 분께 사과를 요구했던 것이 얼마나 순진하고 무례하고 어이없는 일이었는지를 안 것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것이 화근이었다. 그제서야 납득할 수 없었던 사무감사와 경고와 기수에 맞지도 않게 갑작스레 이루어진 외딴 곳으로의 발령 등등 그 후 여자에게 일어났던 설명되지 않았던 모든 일들의 이유가 갑자기 또렷해진 것이 화근이었다.

수없는 시간들을 수많은 밤들을 자기반성, 자체검열, 자아성찰 이딴 것들로 채워가고 있었는데, 그렇게 비틀비틀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꾸역꾸역 순간순간을 버텨내고 있었는데…

그런데 별안간 왜 세상이 그리 뱅글뱅글 돌아버린 것인지...왜 그렇게 와락 무너져 내려 버린 것인지....

#4

오후 5시가 막 넘어섰는데도 여전히 햇살이 눈부시다. 혀 속은 여전히 쓰다.

햇살을 머금은 채 반짝이는 바람 사이로 한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여자의 머리 속에는 아직도 ‘82년생 김지영’의 내용들이 휙휙 스쳐 지나갔다.

여자는 고개를 내저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여자 탓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다.

밝은 옷과 치마를 좋아했던 여자는 어느 샌가 검은 색 바지만 입고 있었다. 치마가 조금만 짧아도 옷의 색상이 조금만 밝아도 ‘네가 이러니 그런 꼴을 당했지’ 어디선가 수근대며 여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파마를 한 게 언제였는지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누군가 처음부터 내 탓이 아니라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주었다면, 내 삶은 달라졌을까....

임관 이틀 전 관사가 나왔다는 연락을 받고 이사를 하면서 인사를 간 여자를 청장은 다음날 떠나는 검사들 환송식에 참석시켰다.

‘나는 술 안 먹는 검사는 검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대생을 싫어한다. 나는 여검사를 싫어한다. 너는 내가 싫어하는 것을 다 갖추었으니 완전 악연 중에 악연이다. 너 같이 생긴 애치고 검사 오래 하는 애 못 봤다. 내가 너 검사 얼마나 하는지 지켜보겠다.’라며 독설을 퍼부어내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아 참 너는 아직 검사도 아니지만....’

부장이 그다지 취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여자를 더욱 당혹스럽게 해 여자는 대꾸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저 아랫 입술을 꾸욱 깨무는 외에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여자가 술을 못 마시는 것도, 이대를 졸업한 것도, 여성인 것도 모두 사실이었다.

그럴 때마다 여자는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한없이 생각해야만 했다.

밥을 먹기 전에는 신속하게 숟가락 젓가락과 티슈를 세팅하고, 모든 컵에 물을 따라 서열 순대로 상관과 선배 앞에 대령하고, 밥을 먹으면서도 행여나 비워진 접시나 물컵이 있는지 계속해서 살펴보다가 사라진 음식을 주문해내고 물을 따라야 하는 부지런을 떨어야 하는 것이 여자가 말석이라서 해야 하는 것인지 여성이기 때문에 해야 하는 것인지 잘 판단이 서지 않아서였다. 길을 걸을 때도 산을 오를 때도 단 반걸음이라도 윗사람보다 앞서지 않도록 수시로 애써 속도를 조정하며 서열 순대로 걸어가는 모습들이 영 어색해서였다.

생각해보면 한때 공주였던 적도 있었던 것만 같아서 -대학에 막 입학해 고등학교 때보다 몸무게가 한껏 빠져 스스로 만족감을 느꼈던 그 때 정도 - 자신도 모르는 새 무엇을 잘못했나....부장 입에 ‘공주’라는 말이 올라올 때마다 여자는 괜시리 어깨가 움츠러 들었다.

술잔이 얼마나 돌았을까....눈빛이 살짝 흐려진 부장은 여자의 이름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부르더니 이렇게 말했다.

여자의 사건을 단 한건도 결재해보지 않은 채 모든 사람 앞에서 ‘너는 여기 있는 애들의 50프로야’라고 확신에 차 말하고 있는 부장보다, 그 옆에서 연신 머리를 끄덕끄덕 하며 ‘옳으신 말씀이야. 새겨들어’라고 말하던 평소 가장 점잖다고 생각하던 바로 윗선배 A의 모습이 여자에게는 더욱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딸만 둘 있고, 입만 열면 딸들 자랑에 침이 마를 새 없었던 부장은 노래방만 가면 2시간씩 혼자 마이크를 잡고 있다가, 마이크만 놓으면 여자에게 부르스를 추자면서 풀린 눈으로 집요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후로도 많은 일들이 벌어졌고,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이제는 처음처럼 그것들이 여자의 마음 속 깊이 파고들어 여자를 괴롭히는 일은 자주 없었다.

다시 한번 부장으로 만난 호리호리한 예전 부장이 회식자리에서 술에 취해 꽤나 오랜 시간 여자의 손을 주물러댈 때, ‘다른 사람들은 이 장면을 못보고 있나, 왜 다들 아무렇지도 않게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손을 주무르는 것은 추행으로 볼 수 없는 것인가’....언젠가의 그날처럼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한참을 생각해야만 했던 그런 일이라던가,

‘누나 저 너무 외로워요, 오늘은 집에 들어가기 싫어요, 저 한번 안아줘야 차에서 내릴 꺼예요’라고 행패를 부리던 F후배 -유부남이었다 -나,

노래방에서 나직한 눈빛으로 여자를 바라보며 ‘도대체 너는 왜 우리 회사에 왔냐’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대더니, 술도 못 마시는 게 분위기도 못 맞춘다는 말을 피해보려 - 그 나직한 눈빛도 피해야했고 - 열심히 두드린 탬버린 흔적에 아픈 손바닥을 문지르고 있던 여자에게 ‘네 덕분에 도우미 비용 아꼈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던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부장이나,

그럴 때마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랫입술을 꾸욱 꾸욱 깨무는 것 뿐이었다.

평생 한번 받기도 어렵다는 장관상을 2번을 받고, 몇 달에 한번씩은 우수사례에 선정되어 표창을 수시로 받아도 그런 실적이 여자의 인사에 반영되는 일은 별로 없었다. 여자의 실적이 훨씬 좋은데도 여자가 아닌 남자선배가 우수검사 표창을 받는다거나, 능력 부족으로 여자가 80건이나 재배당받아 사건을 대신 처리해줘야 했던 남자후배가 꽃보직에 간다거나 하는 일이 종종 일어날 때도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아랫입술을 꾸욱 깨무는 외에는...

#5

여전히 여자의 머리 속엔 계속 한가지 생각이 뱅뱅 돈다.

역시 모든 것이 내 탓이었나. 아무런 말도 못한 채 그저 꾹꾹 삼키고 또 삼켜냈던 내가 역시나 잘못이었나.....

사라진 것 같았던 어지럼이 갑자기 밀려와 여자는 다시금 찬란한 햇살을 따라 빙그르르 돈다.

딸을 낳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야....딸을 낳지 않은 게 얼마나 얼마나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