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스타 뒤 '유령 노동자' 스타일리스트 보조의 눈물

2018-01-02     이진우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은 제 몸만큼 큰 가방을 가지고 서울 강남구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 몰려 있는 홍보대행사를 들르는 게 일상이다. 연예인에게 협찬할 옷을 빌리거나 반납하는 게 주요한 일과이기 때문이다.

전국여성노동조합 서울지부는 지난 11월28일 스타일리스트와 스타일리스트 보조(어시스턴트)를 대상으로 진행한 ‘서울 스타일리스트 노동 실태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보고서의 제목은 ‘유명 스타 뒤의 유령 여성 노동자’였다. 설문 참여자 203명 가운데 81.6%가 임금을 한 달 100만원도 못 받고 있다고 답했고, 하루 8시간 넘게 노동한다는 비율이 93.1%, 12시간 넘게 일한다는 비율도 40.7%나 됐다. 여성은 93.6%였고, 나이는 ‘20살에서 25살’이라고 답한 이들이 78.3%였다. 가장 많이 응답한 답변으로 종합하면, 20대 초중반의 여성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이 하루 8시간 넘게 일하면서 한달에 100만원도 손에 쥐지 못하는 셈이다.

오전 10시 반께 하 실장의 논현동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에는 이날 반납해야 하는 의상이 비닐봉지 여러 개에 담겨 있었다. 배우 2명과 방송인 3명을 위해 협찬받은 의상이다. 언뜻 봐도 50벌은 되어 보였다. 코트도 있어 봉투 하나만 들어도 제법 무거웠다. 이 옷들을 들고 협찬을 받았던 홍보대행사를 찾아가 돌려준 뒤, 담당 연기자의 콘셉트와 배역에 맞는 옷들을 다시 협찬받아 오는 게 이날의 일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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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납 뒤에는 옷걸이에 잔뜩 걸려 있는 수백벌의 옷 가운데 연기자의 취향과 작품 성격에 맞는 옷들을 고른다. 한 장면 촬영에도 옷을 5~6벌은 챙겨야 한다. 현장에서 배우의 선택권을 존중해줘야 하는데다, 상대역들과 옷 색깔이 겹치는 경우도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홍보대행사마다 돌아다니면서 이 작업을 온종일 반복한다.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의 가방이 계속 무거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날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만난 스타일리스트 보조들은 다들 비슷한 모습이었다. 20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여성들이 롱패딩을 입은 채 양쪽 어깨엔 커다란 검은색 가방을 메고 있었다. 이들은 장시간 노동과 박봉에 시달린다는 공통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한 지상파 방송 드라마에 출연 중인 남자배우의 스타일리스트 보조로 3개월째 일하고 있다는 권은혜(가명·21)씨는 패션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이쪽 업계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그는 일이 많고 월급이 적다는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고 말했다. “월급이 50만원이에요. 연기자가 일주일 내내 드라마 촬영을 할 때도 있어서 하루도 쉬지 못한 적도 많아요. 하루에 20시간 가까이 일할 때도 있고요. 그럴 때마다 ‘알바해도 이것보다 돈은 더 받겠구나’ 생각하죠. 아직도 부모님께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처지예요.”

“고정적으로 쉬는 날이 없었어요. 집에서 쉬고 있다가도 아이돌이 부르면 나가야 했죠. 한번은 쉬는 날이었는데, 한 멤버가 특정 브랜드 스타일의 옷을 입고 개인 약속 자리에 가고 싶다면서 협찬을 빨리 받아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급하게 구해서 갖다준 적도 있었어요. 그때 ‘현타’(현실자각타임)를 제대로 맞았죠.”

지난달 4일 강남구 논현동 하수진 실장의 사무실에 협찬 뒤 반납해야 할 의상과 신발 등이 쌓여있다.

차가운 압구정 로데오 거리에서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감당하며 화려한 스타 산업의 한축을 맡고 있지만, 이들 모두가 실장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보조 생활 6개월 만에 실장을 달고, 누군가는 10년이 지나도 보조 생활만 전전하기도 한다. 하수진 실장은 “실장을 달기까지 평균 몇년이 걸린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실장을 다는 일은 천차만별”이라며 “인맥이나 운에 따라 전담 연기자가 빨리 생기기도 하고, 운이 나쁘면 10년 동안 보조 생활만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스타일리스트 업계도 지속가능한 산업 생태계를 만들기 위해 고질적인 장시간 저임금 노동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2017년 7월 스타일리스트협회를 결성한 이들은 △근로계약서 작성 △최저임금 적용 등 최소한 근로기준법 준수를 이뤄내자며 업계 관계자를 설득하고 있다. 또 스타일리스트 경력에 따른 민간자격증을 만들어 최소한의 대우를 인정해주려는 움직임도 있다. 최숙희 스타일리스트협회장은 “민간자격증을 만들어 경력에 따른 최소한의 대우를 보장하고, 공식적인 채용 창구도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