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뻔한 세계에서 '혁명'을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그'는 '젊고 재능 있는 예술가', '우울증 환자', '내성적이고 외로웠던 사람', '개인을 소모시키는 한국형 연예산업과 여론으로 둔갑한 악플의 피해자' 같은 '뻔한' 존재로 환원된다. 불충분하다. 미시적·거시적 조망을 총동원해도 '그 자살'의 의미는 언제나 그 이상이다.

2017-12-27     오혜진

그날 신촌 한 백화점의 화장품 코너는 못 하나 꽂을 곳 없이 붐볐다. 연말 특수를 단단히 맞은 것 같았다. 나는 선배의 생일파티 겸 송년회에 가져갈 선물을 고르고 있었는데, 누군가가 전해주었다. 그가 자살했노라고.

그러자 내가 속한 시공간의 분주함과 번잡함이, 그 기묘한 활기와 의욕들이 꽤 생경해졌다. 자연스럽지 않았다. 물론 이 모든 건 머릿속에서만 일어난 일일 뿐, 내가 지체 없이 쇼핑을 마치고 유유히 백화점을 빠져나왔다는 것도 명백한 사실이다.

'더 정확한' 설명이나 분석을 원한 게 아니다. 두려운 것은 '그 자살'에 대한 해석의 '즉물성' 자체였다. '고통과 해석 사이에서'라는 부제가 달린 책에서 인문학자 천정환은 이렇게 썼다. "자살을 다루는 수없이 많은 단신들은 자살이라는 복잡한 인간 드라마를 그야말로 단신화한다. 그런 단신은 자살자의 개별성을 다 뭉개놓는다."

'불가지한 것'에 대한 앎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불가지에 도전하는 모든 불충분한 묘사와 해석이 쓸모없다는 것도 아니다. 어쩌면 자살을 선택하는 (반)주체적 인간에 대한 평면화된 해석과 묘사는 인간 언어 자체에 내재한 한계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생각했다. 모든 인간의 선택과 변화 (불)가능성을 본질화하는 그 혁명에 함께하지 않겠다고. 이토록 '뻔한' 세계에서, 모두의 안식을 빈다.

*이 글은 한겨레에 게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