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항야족 탄압에 대한 아웅산 수치의 침묵을 참을 수 없는 이유

2015-06-06     김도훈

또 수치가 “압제에 맞서는 싸움의 중요한 심볼”이라고도 했다.

UN에 따르면 ‘세상에서 가장 핍박받는 소수집단’인 로힝야족은 최근 몇 년 간 자신들의 곤경이 주목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

몇 주 전 로힝야족 수천 명이 태국,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에 도착하기 전까지의 일이다. 아직도 이 세 나라의 바다에 수천 명의 로힝야족이 허술한 배를 타고 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음식과 깨끗한 물은 점점 바닥나고 있다.

‘너무 배고프다. 너무 말랐다.’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그 사람들을 보고 나와 내 친구들은 울었어요. 그들이 너무 배고파 보이고 너무 말라서요.”

그들이 처한 압제적 상황은 130만 명의 로힝야족 무슬림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하지 않는 것부터 이동, 취업, 교육 및 의료 서비스 접근을 엄격히 제한하는 것에 걸치며, 로힝야족이 사는 라킨 주는 로힝야족이 가정당 두 명까지만 아이를 낳을 수 있게 하는 차별법도 도입했다.

수십만 명이 자기 집에서 쫓겨났고, 광란에 빠진 군중들이 그들의 도시와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2014년에 정부는 심지어 ‘로힝야’라는 단어 사용까지 금지하며, 미얀마에서 수세대에 걸쳐 살아온 소수 무슬림인 로힝야들이 인구 조사에서 ‘벵골인’으로 분류되도록 했다.

용납할 수 없는 침묵

‘집단 학살에 있어, 침묵은 공모다. 아웅산 수치도 마찬가지다.’ 런던 대학 법학 교수이자 국가범죄 계획 디렉터인 페니 그린이 ‘인디펜던트’ 사설에 최근 쓴 글이다. ‘막대한 도덕적 정치적 자본을 지닌’ 미얀마의 야당 지도자 수치는 ‘버마의 정치적 사회적 담론의 특징인 용납할 수 없는 인종차별과 이슬람 공포증’에 도전할 수 있었다고 그린은 썼다.

예를 들어 수치는 2013년에 BBC와 인터뷰하면서 추잡하게도 이 폭력이 ‘양측 모두에’ 책임이 있다고 하며, 인터뷰어 미샬 후세인에게 ‘무슬림들이 타겟이 되었지만 불교도들을 대상으로 한 폭력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미얀마에서 악취가 풍기는 수용소에 갇혀 ‘굶주림, 절망, 질병에 서서히 굴복하는’ 사람들은 불교도들이 아니다. 국제인권감시기구가 ‘인종청소’라고 부르는 일을 당한 것도, UN의 미얀마 인권 상황 특별 조사 위원이 ‘인류에 대한 범죄까지 이를 수 있다’고 한 일을 당한 것도 불교도들이 아니다. 이 나라에서 도망치려고 비좁은 배에 올라타는 것도, 그러는 와중에 망치와 칼로 공격을 받는 것도 불교도들이 아니다.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집단 학살에 직면한 사람들은 불교도들이 아니다.

‘집단 학살’의 위험

그들은 5월 초에 발표한 보고서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집단 학살의 여러 전제 조건이 이미 존재한다는 깊은 우려를 안고 버마를 떠났다.”

그러나 배와 시체들, 보고서와 폭로에도 불구하고 수 치는 아직도 말이 없다. 로힝야족들은 문자 그대로 목숨을 구하려고 달리고 있는데, 수치는 그들을 돕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한 적이 없다. 노벨평화상 수상자에게는 좀 더 많은 걸 기대해야 하는 것 아닐까?

라빈, 아라파트, 오바마…… 결국 그들은 물론 모두 정치인들이다. 수치는 다른 존재, 그 이상의 존재라고 우린 생각해왔다. 도덕의 아이콘, 인권 챔피언, 현대판 간디.

슬픈 진실

슬픈 진실은 이제 우리가 장밋빛 색안경을 벗고 ‘그 분’을 바라볼 때가 이미 한참 지났다는 것이다. 수 치의 본모습을 보아야 한다. 한때 양심수였던 것은 맞지만, 이제는 자기 이익만 생각하는, 원칙보다 득표를 더 중요시하는 정치인인 것이다. 죄없는 로힝야족의 생명보다는 정당 정치의 발전이 그녀에겐 더 중요하다.

세상 따윈 잊어라. 그녀는 고국에서부터, 라킨의 로힝야족에서부터 시작해야 했다. 그러지 않겠다면, 혹은 그럴 수 없다면, 20년 넘게 기다렸다가 받았던 상을 반납하는 걸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알 자지라에 먼저 게재되었다.

허핑턴포스트US의 Why Aung San Suu Kyi's Silence on the Rohingya Is Inexcusable를 번역, 편집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