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운동 대표 NL이 ‘대중정당의 길' 실패한 이유는?

2017-12-01     김도훈
ⓒ한겨레

NL 현대사-강철서신에서 뉴라이트까지 : 박찬수 지음/인물과사상사·1만5000원

주사파 논란이 일었다.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3기 의장 출신인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을 겨냥해 전희경 자유한국당 의원이 “주사파, 전대협 운동권이 장악한 청와대”라고 색깔론을 들고나온 것이다.

‘엔엘’(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이라 불리는 운동 사조의 변천을 제대로 모르면 전 의원의 말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알 수가 없고, 더 나아가 한국 현대사도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그가 “엔엘 사조가 우리 사회에 남긴 흔적 중 가장 아픈 부분은 과거의 잘잘못을 공개적으로 성찰하지 않고 격동의 시기를 지나쳐온 점”이라며 지난해 '한겨레' 토요판에 15회로 연재했던 기사를 대폭 보강해 책으로 냈다.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은 이런 반미 정서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1986년 봄, 김영환이 ‘강철’이란 필명으로 주체사상을 따르자는 내용의 ‘강철서신’을 대학가에 뿌렸고, 이는 학생운동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왔다. 단재사상연구회가 전국 주요 대학에서 그동안 학생운동의 주도 세력인 서클을 해산하는 운동을 주도하면서, 엔엘은 학생운동권의 주도권을 틀어쥐게 된다.

주체사상이나 식민지반봉건사회론에 시대착오적인 약점이 있었음에도 엔엘이 운동권의 주류로 성장할 수 있던 것은 대중노선과 품성론을 통해서였다. 엔엘은 투쟁의 수위와 방법, 슬로건을 대중의 시선에 맞춰 내놓았고, 엔엘 운동가들은 헌신적으로 사람들을 이끌었다.

전대협은 1989년엔 분단 이후 처음으로 평양에 남한 학생 대표를 파견했고, 1991년 민자당 창당 반대 시위 때는 10만명의 학생을 동원했다. 1990년 '시사저널' 여론조사에서 전대협은 여당과 야당에 이어 ‘한국을 움직이는 단체’ 3위에 오를 정도로 강력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했다.

1989년 3대 전대협 의장이었던 임종석(현 청와대 비서실장)은 수배 상태임에도 공개 석상에 나타나서는 2천명의 전경을 유유히 따돌리고 빠져나가는 등 신출귀몰한 행보로 ‘임길동’이라고 불렸다.

‘엑스(X)세대’의 출현으로 대학가 분위기도 바뀌었다. 외적 환경은 바뀌어 가는데, 조직 내부에선 이념 중심인 활동가 그룹의 입김이 더 세지는 모순이 심해졌다. 결국 1996년 연세대 사태 당시 전경 1명이 사망한 일은 학생운동의 정당성과 대중성에 타격을 입혔다.

전북 엔엘 학생운동의 핵심이었던 허현준도 김영환과 함께 전향했다가 2013년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행정관이 돼 극우단체의 관제시위를 지원하고 조종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숨겨진 실세 이석기 전 의원이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경선에서 1위에 올라 국회에 진출한 일은, 진보정당을 뒤흔드는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일이었다. 지은이가 “전체 당원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정당에 표를 던진 수많은 일반 유권자의 요구를 강고한 조직력으로 뛰어넘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은 오만한 착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