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가 사도세자 묘지문에서 직접 밝힌 죽음의 이유

2017-12-01     김원철

-사도세자의 묘지문 중

사도세자 묘지문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둘 것을 명령해 끝내 파국으로 몰아간 아버지 영조가 임오화변(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며칠 뒤 사망한 사건)이 일어난 지 불과 2달 뒤 ‘직접’ 썼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정작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묘지문의 내용이었다. 그동안 사도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가 쓴 회고록인 '한중록' 등에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심정 등이 구체적으로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 묘지문. 사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공식 누리집

공개되기까지

배봉산은 사도세자를 “7월 23일 양주 중랑포 서쪽 벌판에서 매장하노라”라고 적은 묘지문의 기록과도 일치하는 장소다. 묘지석의 외형은 가로 16.7㎝, 세로 21.8㎝, 두께 2.0㎝의 청화백자로 만든 사각형 판석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5장씩 2벌 모두 17장이 출토됐다. 2벌은 묘지석 크기와 묘지문 내용까지 모두 동일하다.

묘지석은 1979년 국고에 수입된 뒤, 1989년 문화재관리국에서 발행한 책자인 <중요발매장문화재도록>을 통해 그 존재가 알려졌다. 그러나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한 채 발굴된 모습 그대로 수장고에 보관돼왔다. 국립중앙박물관은 그 사료적 가치에 주목해 깨진 지석들을 접합하고 보존 처리한 뒤 1999년 12월 1일부터 한 달간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세간의 큰 반향이 일어났다.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제1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어제지문 유명조선국 사도세자 묘지

나면서부터 총명하였고 자라면서는 글월에도 통달하여 조선의 성군으로 기대되었다 . 오호라 , 성인을 배우지 아니하고 거꾸로 태갑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웠더라 . 오호라 , 자성하고 마음을 가다듬을 것을 훈유하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 .

하지만 성인을 배우지 않고 도리어 방종을 일삼아 계도하려고 했으나 제멋대로 소인들과 어울려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제2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그는 본래 풍족하고 화락한 집안 출신이나 마음을 통제치 못하더니 미치광이로 전락하였더라. 지난 세월에 가르치고자 하는 바는 태갑이 일깨워주는 큰 뉘우침이었지만 , 끝내는 만고에 없던 사변에 이르고, 백발이 성성한 아비로 하여금 만고에 없던 짓을 저지르게 하였단 말인가? 오호라, 아까운 바는 그 자질이니 개탄하는 바를 말하리라. 오호라, 이는 누구의 허물인고 하니 짐이 교도를 하지 못한 소치일진대 어찌 너에게 허물이 있겠는가? 오호라 , 13일의 일을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어찌 내가 즐기어 하였으랴. 만약 네가 일찍 돌아왔더라면 어찌 이런 일이 있었으랴.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가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제3장

영화 <사도> 갈무리. 사진 출처 쇼박스

제3장 5행까지로 이뤄진 세 번째 내용은 이 묘지문의 절정이다. 사도세자가 숨진 임오화변의 간략한 전말과 아버지인 자신의 비통함을 술회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도는 이 글월로 하여 내게 서운함을 갖지 말지어다.”

-제4장·제5장

경기도 화성에 있는 사도세자의 능 ‘융릉’. <한겨레>자료 사진. 강판권 교수 제공

세자는 임술년 (1742)에 학문에 들어가고 계해년 (1743)에 관례를 올리고 갑자년 (1744)에 가례를 올려 영의정 홍봉한의 여식이자 영안위 주원의 오대손인 풍산 홍씨를 맞아들였다. 빈은 2남 2녀를 두었는데, 첫째가 외소세손이며 둘째도 곧 세손으로 참판 김시목의 여식이자 부원군의 5대손인 청풍 김씨와 가례를 올렸다.

승정 기원후 135년 임오 (1762,영조 38년 ) 7월 일.

영조는 이 장에서 국가와 왕실의 문장을 작성하는 신하에게 묘지문을 대신 짓게 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입으로 불러 받아 적게 했다고 밝혔다. 통상적으로 ‘어제(직접 쓴)지문’이라 할지라도 신하가 대신 쓰는 경우가 많았다. ‘사도세자 묘지문’의 경우 영조가 죽은 사도세자를 애도하며 직접 지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이 같은 내용을 넣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서 영조는 이는 30년 가까운 부자지간의 은의를 밝힌 것이라고 적었다.

참고문헌

조선시대 법령자료 <대전통편 >

<휘경동출토 백자청화어제사도세자묘지명 >-김울림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 조원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