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정치학

이국종-김종대 논란을 뒤늦게 보면서 기시감이 든다. 이교수는 그저 환자를 '집도' 대상으로서 건조하게 마주하고(그러나 그 신체에는 최대한의 성실성으로 마주하면서), 그렇게 신체가 하나의 신체일 수 밖에 없었던 시간에 본 일을 말했을 뿐이다. 그러니 그 때 파악된 언급된 기생충이니 분변이니 역시 신체에 부수된 건조한(신체적 의미만 갖는) 대상일 뿐이다.

2017-11-23     박유하

이국종-김종대 논란을 뒤늦게 보면서 기시감이 든다.

김종대 의원은 환자의 인권을 말하면서 에이즈환자를 예로 들었고,많은 이들이 공감한 것 같다. 하지만 "에이즈"가 말해서는 안되는 개인정보임에 우리가 공감하는 건 "에이즈"라는 병이 사회적차별 대상임이 사회적으로 인지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기생충도 물론 우리가 어렸을 땐 수치스러운 사안이었다 .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니다. 다른 공간에서 온, 어쩌면 다른 시간대를 살다 온 북한사람의 신체상태가 그렇다는 것을 수치(羞恥)로 보는 것은, 그러니까 감추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은 이미 그 시선자체가 감성/혹은 정치적임을 보여준다.

그런데 다른 시간/다른 공간을 산 결과가 만든 신체는 수치인가? 그렇다고 한다면, 북한남성들의 왜소한 신체조차 우리는 감추어야 할 개인 정보로 취급해야 한다. 중요한 건, 눈앞의 대상을 어떻게든 열등한 것으로 파악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우위성을 주장하려는 시도자체에 대한 항의일 뿐, 대상자체의 상태가 아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굳이 감추려 했던 이들이(정치적 목적이든, "인간의 존엄"을 위해서든, 그 행위 자체가 위안부를 당당하게 만들지 못한다는 점에서 역시 차별구조를 공고히 한다) 본인에게 가서 "할머니를 매춘부라고 했어요!" 라고 말해 문제시한 게 '제국의 위안부' 고발 사태였다.

문제는, 그 대부분의 시도가, 인식의 새로운 전환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태를 혼란에 빠뜨리고, 사회적 소모만을 불러 일으킨다는 점에 있다.

* 이 글은 필자의 페이스북에 게재된 글입니다.